책 소개
50여 년 시인 인생의 결실, 나호열 시인의 시선집 출간!
글을 쓰기 시작한 지 50여 년, 이제 고희에 이르러 그동안 펴낸 20여 권의 시집에서 시 213편을 골라 시선집을 엮었다.
이번 시선집 《울타리가 없는 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는 첫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부터 《당신에게 말 걸기》(2007)까지 중 109편을 추렸고, 2부는 《타인의 슬픔》(2008)부터 《안부》(2021)까지 중 104편을 골랐다. 3부는 지금까지 나온 시집에 수록된 해설을 실었다.
1부의 해설을 쓴 정병근 시인은 나호열 시인의 시에 흐르는 주요 정서를 ‘고독과 슬픔’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고독은 배제와 소외에서 비롯된 실존적 감정이고, 슬픔 혹은 쓸쓸함은 모든 시의 바탕을 이루는 배경음과도 같다. 시를 쓸 때 시인은 고행을 마다않는 고독한 구도자와 같은 역할을 스스로 떠맡음으로써 시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유한한 세계에서, 고독과 슬픔은 사회적인 연대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근원적이며 세상의 아픔을 서슴없이 껴안고 그 껴안음에 기꺼이 깃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시는 혼자 쓸쓸하게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차이성과 분열성을 옹호하는 모더니즘보다는 과거를 성찰하고 융합하는 동일성의 세계관이 더 가깝게 작동하며, 사회적인 기여보다 개별자의 삶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세계관은 그의 대표 시라고 할 만한 〈북〉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비장함마저 드는 이 시는 고독이나 슬픔이 단지 감정의 낭비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마디 말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하지만 시인은 고독과 슬픔의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그는 〈백지〉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노래한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움’의 원인과 속성을 ‘백지’라는 상징물을 빌려 역설적인 화법으로 표현하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내비친다. 드디어 시인은 ‘숲’에다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편지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던가! 대화와 소통이 시작될 때 정말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다.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시이기도 한 〈당신에게 말 걸기〉는 시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잘 보여준다.
못난 꽃이 어디 있겠는가. 꽃은 가장 아름다운 환대의 형색으로 우리의 눈을 붙잡는다. 빛을 타고 나타나는 모든 만물이 꽃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저마다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대동 세상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한쪽에 외따로 떨어져서 피어 있는 작은 꽃에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듯하다. 꽃은 자기가 예쁜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그런 꽃에게 말을 걸며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여기에서 ‘당신’은 늙은 사람이거나 소외된 이웃 또는 배우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빠짐없이 보살피는 천수천안의 그것과도 같은 사랑을 보인다. 이것이 시의 사명이고 시인의 숭고함이다.
나호열 시인의 시는 스스로 고독자의 길을 걸으며 염결한 슬픔으로 세상의 아픈 부분을 짚어내고 그곳에서 초월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작가 소개
나호열
본향은 충남 서천, 피난지인 부산에서 태어났다. 은행원이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 여섯 살에 서울 정릉에 정착했다. 경동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괴정을 마쳤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지나며 실존주의 철학에 매료되어 철학을 전공으로 삼았다. 연극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우연히 대학신문에 꽁트를 게재하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울림시 동인(1980)으로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1, 2, 3집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월간문학》(1986)과 《시와 시학》(1991)으로 등단했다. (사)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 (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문화위원으로 문화예술정책분야에서 활동했다. 현재 도봉문화원 부설 도봉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첫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이후 《눈물이 시킨 일》(2011), 《촉도》(2015),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2017), 《안녕, 베이비 박스》(2019), 전자 시집 《예뻐서 슬픈》(2019) 등을 상재했다.
목 차
시선집을 내면서: 설니홍조(雪泥鴻爪)와 자지자기(自至自棄) 사이의 오십 년
1부 달팽이처럼 낙타처럼 안개처럼
모기향을 피우며
젖소
오징어를 씹으며
카나리아―수인(囚人)을 위하여
통조림
오늘의 뉴스
뜬구름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타클라마칸 2
어떤 하루 1
꽃
한려수도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49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길
매화를 생각함
사람을 찾아서
비누
마지막 잎새
장사(壯士)의 꿈
투우(鬪牛)
코뿔소
노새의 노래
옷과의 대화
오리털 이불
한계령(寒溪嶺)
겨울 숲의 은유
갈대
몽고를 꿈꾸다―상계동 25
칼과 집
동행(同行)
동상이몽―상계동 1
집과 무덤
양수리에서
어느 날 오후의 눈보라
눈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빈 화병
벽(壁)
사랑은
울진 적송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
실크로드
만해시인학교
산막(山幕)
노을
곰소 염전
건봉사, 그 폐허
여행길 1
여행길 2
달팽이의 꿈
바람으로 달려가
내 마음의 벽화 1
아침에 전해준 새소리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촛불을 켜다
이메일
밤에 쓰는 편지
인터넷이 가르쳐준 그리움
수행(修行)
탑과 벽
조롱받는 새
싸움닭
김대균의 줄타기
개 같은 날의 오후
천국에 관한 비망록―42.195km
화병(花甁)
달팽이
그
물을 끓이며
산다는 것
한강 유람선 위에서
통화 중(通話中)
밤바다
안개
저녁 부석사
병산(屛山)을 지나며
어느 날 종소리를 듣다
43번 국도
어느 봄날에 일어난 일
그 자리
벚꽃 축제
밤나무 이야기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
홍도화(紅桃花)
국화에게
눈길
길 없는 길
밀렵 시대
물을 노래함
얼굴―봉감모전오층석탑
꽃
발자국
의자
그 신호등은 나를 서게 한다
인디고(Indigo) 책방
제비꽃이 보고 싶다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Guest Room GS3
북
그 밤나무
매화
어느 여배우의 죽음
7번 국도
백지
눈부신 햇살
공에 대한 질문
당신에게 말 걸기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해설: 염결한 고독자의 시(정병근)
2부 저녁에 닿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떠난다
타인의 슬픔 1
폭포
강물에 대한 예의
안아주기
아다지오 칸타빌레
정선 장날
춤
김옥희 씨
풍경
긴 편지
음지식물
법고 치는 사내
나무
모란꽃 무늬 화병(花甁)
예감
지도책
폐사지에서
종점의 추억
눈물이 시킨 일
틀니
생각하는 사람
공하고 놀다
담쟁이의 꿈
이사
지렁이
어떤 안부
쉰하고 여덟
Sky life
불타는 시(詩)
스물두 살―전태일
촉도(蜀道)
봉선사 종소리에 답함
장항선
어슬렁, 거기―거진에서
어느 유목민의 시계
구석기(舊石器)의 사내
아무개
말의 행방
심장은 오늘도 걷는다
씨름 한 판
비가(悲歌)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수평선에 대한 생각
모시 한 필
별똥별이 내게 한 말
오래된 밥 1
돌아오지 않는 것들―옛 구둔역에서
서 있는 사내 1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뿔
봄비
새벽 강
땅에게 바침
거문고의 노래 1
모텔 아도니스
못난―신성리 갈대밭에서
후일담(後日譚)
의자 4
인생
목발 1
숲으로 가는 길
잊다와 잃다 사이
수화(手話)의 밤
바람 센 날
뾰족하다
바람과 놀다
구둔역에서
등
손
메리
골드 스타
안녕, 베이비 박스
개소리
구름
석등에 기대어
돌멩이 하나
봄
진화론을 읽는 밤
만종(晩鐘)
사막의 꿈
안개
여름 생각
매미
담장 너머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2―사랑의 힘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9
허물
탑이라는 사람―선림원지삼층석탑
반골(反骨)
68쪽
안부(安否)
사랑의 온도
비애에 대하여
이십 리 길
걷는 사람들―기벌포에서
화병
손금
틈
당신이라는 말
구걸(求乞)의 풍경
후생(後生)
북의 행방
풍경과 배경
해설: 타자 지향의 시 쓰기(황정산)
3부 첫발을 내딛는 꽃잎의 발자국 소리를 사막에 담다
존재와 인식의 먼 길(정한용)―《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에의 길(박윤우)―《칼과 집》(1993)
존재의 내면 들여다보기(김재홍)―《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9)
달팽이처럼 낙타처럼 안개처럼(김삼주)―《낙타에 관한 질문》(2004)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사람의 여정(한명희)―《당신에게 말 걸기》(2007)
인고의 세월 속에 풍화된 기다림과 성찰의 시학(박영우)―《타인의 슬픔》(2008)
거꾸로 읽는 경전, 문장(조영미)―《눈물이 시킨 일》(2011)
시의 빗자루를 들고 경계에 서 있는 시인(정유화)―《촉도》(2015)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박진희)―《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2017)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황정산)―《안녕, 베이비 박스》(2019)
가벼워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황정산)―《안부》(2021)
연보를 대신하여: 시인들의 마니또이자 견인차
부록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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