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나는 파국을 맞고서야 자아 발견이라는 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성 디아스포라의 삶, 아메리칸 서울
차별과 폭력에 수없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일어서다
전직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헬레나 로는 이민을 선택한 부모의 슬하에서 네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어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랐고, 전문의가 되어서는 동양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감수하며 지냈다. 폭력적인 백인 남편과의 이혼,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의 자살 시도, 질투로 인한 자매간의 불화 등 그의 삶은 쓰라린 고통과 상처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헬레나 로는 이러한 경험을 오랫동안 염원한 글쓰기로 풀어내며 자신의 가족, 문화, 정체성을 새로이 탐구해나간다. 좋은 딸이자 아내, 엄마, 그리고 의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시간들을 긍정하고 더는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아메리칸 서울』에서 헬레나 로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담대한 어조로 써 내려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는 것뿐”임을 곱씹으며 “끔찍한 일을 겪으면 더 단단해지고, 그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인 2세대 여성으로서 평생 겪어야 했던 문화충돌과 소외감, 혼란이 남긴 상흔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나간다. 그러므로 『아메리칸 서울』은 여성 디아스포라의 삶이 어떠한 위기와 극복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강렬하고도 진심 어린 고백들을 통해 우리에게 따스한 울림을 선사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라고 조앤 디디온은 말했다. 한 친구는 인생의 “불타는 잔해”를 이야기로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인생의 불타는 잔해는 모두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불타는 대로 그저 두고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들쭉날쭉한 조각을 이어 붙여서 놀랍도록 선명한 자국이 아름답게 남은 새 인생을 꾸릴 수도 있다. _248쪽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인 여성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
헬레나 로는 두 언니와 여동생 사이에서 부모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그 탓에 영문학과에서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접고 부모의 바람대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도통 적성에 맞지 않아 의대를 그만두고 싶어질 때면 합격통지서를 건넨 날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견뎠다. 고생 끝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되어서는 아시아계 여성 의사를 향한 불신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알아듣게 잘 설명한 거 맞아?”
나는 너무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께 수련 중인 레지던트 중 백인이 아닌 사람은 나를 포함해 극소수였고, 나는 다른 레지던트들이 실수했을 리 없다고 늘 믿어주었다. 그때 그 라틴계 보호자에게도 응급실에서 아이를 담당했던 2년 차 레지던트의 오진이 아니니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거짓말했다. (…) 부주의가 분명했지만 나는 그 백인 레지던트의 실수를 덮어주었다. 반면 다른 레지던트들은 내게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쉽게 판단했다. _104쪽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헬레나 로는 목과 어깨 근육의 손상, 만성적인 허리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근무 중에도 수시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누워 약효가 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근무 시간을 협의하려 하자 백인 병원장은 월급을 터무니없이 깎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제도적 보호나 동료들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결국 헬레나 로는 의사직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만 해도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의지로 의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는 게 그것밖에 없었고, 그게 나의 정체성이었다. 착한 한국 딸인 나는 의대에 진학해서 이민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두 분의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도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만성적인 허리통증 환자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통증을 견딜 만할까? 아니면 더 심해질까? 내일은 어떨까? _150~151쪽
“나는 아팠기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됐어”
상처를 극복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의사직에서 물러난 후 헬레나 로는 폭력적인 성향의 남편으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다. 8년이 넘도록 법정 싸움을 이어가며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러는 동안 자매들에게는 “네가 너무 너밖에 모르니까 그 사람이 떠나지” “다시 받아준다고 하면 네가 다 해야 해. 요리, 청소, 빨래까지. 전부 다” 같은 핀잔을 듣는다. 자살 소동을 일으켰던 어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원에 입원한다. 이처럼 헬레나 로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의지할 데 없이 한동안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와중에도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이루고자 의사로서 근무했던 학교에 다시 학부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논픽션 전공 석사과정까지 거치며 제 생의 경로를 처음으로 개척해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한국을 찾아가 가족의 역사를 마주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 만난 이모로부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모의 이민 사유를 전해 듣고, 한국 친척들의 너그러운 환대 속에서 한껏 긴장을 풀어놓은 채 웃음과 위로를 얻는다. 그리하여 헬레나 로는 남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실로 오랜만에 서글픔과 충만함을 동시에 느낀다. 비로소 한국 이름인 ‘희선’으로 불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번에는 다른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이 됐으니까. 13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서울과 통하는 것 같아. 예전에는 몰랐던 역사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도 통하는 느낌이야. 더 알고 싶고, 내 슬픔을 헤치고 나아가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들어.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 여기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_321~322쪽
이렇듯 『아메리칸 서울』은 상처를 어렵게 회복하며 뒤늦게나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없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일어서야 했던 이방인의 삶과 그 이후의 빛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솔직함으로 들려주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이야기다. _「한국어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헬레나 로
전직 소아청소년과 의사. 이민을 선택한 부모의 슬하에서 네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뉴저지의과대학교에 진학해 1992년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존스홉킨스병원, 필라델피아어린이병원, 피츠버그어린이병원 등에서 진료와 후학 양성에 힘썼고 백인 남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2004년에 교통사고로 인한 건강 악화와 직업적 회의감으로 의사직을 내려놓은 뒤에는 오랫동안 염원했던 글쓰기를 공부하기 위해 피츠버그대학교 논픽션 전공 석사과정까지 거쳤다. 남편의 폭력에 의한 이혼, 어머니의 자살 시도, 자매간의 불화, 동양인 여성 의사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 등을 글로 풀어내며 국립과학재단 프로그램 TWP(To Think, To Write, To Publish)에서 글쓰기 펠로십을 받았다. <크리에이티브 논픽션Creative Nonfiction> <슬레이트Slate> <시커모어 리뷰Sycamore Review> <솔스티스Solstice> <엔트로피Entropy> 등에 기고하며 푸시카트상에 세 차례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한인 2세대 여성으로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의 일환으로 『아메리칸 서울』을 집필하였다.
옮긴이 : 우아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출판계에 몸담으며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며 불한·영한 영상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나, 프랜 리보위츠』가 있다.
목 차
들어가며
갈림길
마지막 장손
우간다의 핏빛 플라밍고
친절한 행위는 헛되지 않다
호흡곤란
유리 파편
어머니의 짐
새해 첫날
의료계를 떠나다
한국인 아줌마
성공한 의사
학
모국어
평행우주
벽지의 파란 꽃잎
센트럴파크의 백파이프
학대가 남긴 유산
한국인의 애가哀歌
헤밍웨이와 아바나에서
다시 서울로
한국어판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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