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비유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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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박은숙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24/05/30
형태사항p.131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6485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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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누군가의 비유가 되어 살아가기


2021년 《농민신문》으로 등단한 박은숙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누구의 비유였을까』가 시인동네 시인선 232로 출간되었다. 박은숙은 비록 늦게 출발한 시인이지만 그 열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섬세한 언어 감각 또한 젊은 세대들 못지않다. 발견자로서의 그의 시선은 기발한 상상력에 더해져 독자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이끌어간다.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이 시를 만나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 또 어떻게 좋은 시인이 되어가는지 이 시집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박은숙의 이 시집은 분명, 시를 공부하는 많은 이들에게 꿈과 용기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 해설 엿보기


“나는 누구의 비유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박은숙이 지향하는 정체성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 우선, 그녀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나의 일부임을 아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월이 두툼한 두께를 입었을 무렵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에게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꿈꾸던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만나서 서로 얼굴을 풀어헤치며 헤헤거릴 수 있는 친구. 그 친구의 미소는 잊고 있었던 시절의 나를 불현듯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설경을 바라보았을 때, 혹은 산의 정상에서 동트는 해를 맞이할 때 맥락도 없이 불쑥 내 품 안에 들어오는 어떤 느낌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내가 마주치는 모든 대상은 나의 자아를 넓히고 관심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서 나는 끝없이 다시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낯선 자아를 만나서 나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상대의 영혼에도 다른 색깔들을 입힌다. 이 시집에 나오는 다양한 주체들은 이렇듯 돌아다니며 스며들고 감싸면서 자신의 세계를 축조해 나간다. 「고산지대에서 교실 짓는 법」은 그 축조과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정체성의 창조란 점진적인 장소 설정 과정과도 유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네팔의 고산지대에

바람보다도 허술한 작은 교실을 짓는다

당나귀들이 자재들을 등에 얹혀서

좁고 위험한 산길을 오른다

교실 바닥은 넓적한 돌을 조금씩 맞춰가며 깐다

기둥으로 세울 목재를 등에 진 당나귀가

몇 번 발목을 접질리고 그래서

기둥들은 가끔 삐끗거리는 소리를 낼 것이다

지붕 덮을 자재를 옮기는 동안엔

비와 바람이 겹겹 스며들 것이다

그래서 지붕은 가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이 지붕 끝을 들추는 소리를 낼 것이다


벽은 원래 있던 제자리들을

쌓거나 일으켜 세운다


칠판은 나귀의 등에 실려 오는 동안

초록의 들판과 파란 하늘과 진녹색의 호수와

분필가루 같은 구름이 먼저 사용했다

나귀의 등에 실려 온 창문 두 짝엔

오토바이 한 대를 따라가는 자욱한 먼지와

먼 듯, 가까운 듯, 아지랑이와

방금 닦아낸 깨끗한 햇살이

창문을 따라 실려 왔다


네팔어 기초회화 교재가 실려 오는 동안

타르쵸 수십 장이 갈피마다 묻어왔다

더듬더듬 읽을 때마다

경전을 읽는 바람 소리가 섞일 것이다


교실 한 채가 나귀 등에 얹혀서

험한 길을 겨우 걸어왔다

― 「고산지대에서 교실 짓는 법」 전문


네팔의 고산지대에 교실을 짓기 위해서는 “당나귀들이 자재들을 등에 얹혀서/좁고 위험한 산길을” 올라야 한다. 그 험난한 여로에서 당나귀는 기둥을 세울 목재를 등에 얹은 채 발목을 접질리기도 하고 지붕 덮을 자재를 옮길 동안에는 비에 젖고 바람에 쓸리기도 할 것이다. 나귀의 등에 실려 온 칠판엔 초록의 들판, 파란 하늘, 진녹색의 호수와 구름이 담겨 있고 창문 두 짝엔 오토바이 한 대를 따라가는 자욱한 먼지와 먼 듯, 가까운, 아지랑이와 방금 닦아낸 깨끗한 햇살이 함께 온다. 또한 네팔어 기초회화 교재엔 타르쵸 수십 장이 갈피마다 묻어오고 아이들이 더듬더듬 교재를 읽을 때마다 경전을 읽는 바람 소리가 섞일 것이다. 이 때문에 “교실 한 채가 나귀 등에 얹혀서/험한 길을 겨우 걸어왔다”는 말은 가장 정직하고 적합한 문장이다. 교실을 짓기 위해 필요한 자재들은 당나귀의 눈에 비친 산길의 풍경과 경험을 고스란히 자기화해서 품고 있다. 그래서 발목을 접질린 기둥들은 가끔 삐끗거리는 소리를 낼 것이고 지붕은 가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이 지붕 끝을 들추는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내가 지나온 다양한 장소에 흩어진 내가 존재하듯이 “바람보다도 허술한 작은 교실” 역시 네팔 곳곳의 장소는 물론 다양한 사물들과 함께한다.

― 장예원(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가고 오는 일이 한 벌이라면 앞다투어 떠나는 일은 누군가 앞다투어 오고 있다는 뜻이다. 떠나는 일들치고 뒤에 남겨두지 않는 일 없다. 그것은 필연이지만 필연을 구분 짓는 존재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의 사이엔 서운한 일과 감탄하는 일들이 있다. 짧은 봄볕에 꽃이 떠나고 초록의 배웅이 짙은 그늘을 몰고 오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햇살 일렁이는 것은 안 보여도 그늘 일렁이는 것은 들키듯, 쉬이 보인다. 오고 가는 일이 잦았다면 그건 내가 어중간한 곳에 오래 있었거나 여전히 있다는 뜻이다.

작가 소개

박은숙

충북 중원에서 태어나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21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저서로 수필집 『반지』가 있다. 〈수주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우는 아이·13/고산지대에서 교실 짓는 법·14/국수·16/남 생각을 했다·18/빗방울 화석·20/꽉, 쥔 손·22/불빛을 설득하다·24/각자의 주인·26/피시볼·28/나무들이 따라갔다·30/빈방의 햇빛·32/창문은 어떤 종의 새일까요·34/지구의 부품·36


제2부

비유의 계산법·39/노란 氏·40/옥수수·42/압축 팩·44/재활·46/먼 곳을 충전하다·48/소금쟁이처럼·50/뼈를 보는 시간·52/나의 술래·53/활·54/혜량·56/독촉·58/쉬는 그늘·60/이맘때 비는 어느 쪽 이름일까요·62


제3부

부류·65/지극한 자세·66/파랑 채굴기·68/빗물여관·70/접이식·72/나무들의 문자·74/집배원·76/흙 박물관·78/쓴물·80/빈손의 바통·82/연기의 발명·84/수동적인 비누·86/나무들의 아가미·88/야생·90


제4부

말의 바닥을 보아야겠다·93/멸종 중인 굴뚝들·94/송편·96/망가진 것들의 합산·98/물결무늬 원단·100/껴입은 사람·102/쓴맛·104/난간을 만날 때마다·106/가을이 닮은 동네·107/망종 무렵·108/공중을 고치다·110/전정·112/느낌의 순도·114


해설 장예원(문학평론가)·115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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