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
흘러서 거기 잠깐 머무는 것들과의 조응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안태운 신작 시집
문학동네시인선 216번째 시집으로 안태운의 『기억 몸짓』을 펴낸다. 2014년 등단해 “단단하면서도 독특”한 문장으로 “장면의 전환과 시적인 도약”을 일으킨다는 평과 함께 제35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과,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계절 풍경」) 자문하는 산책자의 내면을 펼쳐 보인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 이후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그사이 시인은 문지문학상과 현대시작품상 후보에 각각 3년과 2년 연속 포함되며 “상상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되기’를 실행하”(김행숙 시인)는 시인, “더 자유롭고 유연한 시의 상상적 모험”(이광호 평론가)을 탄생시키는 시인, “걷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다시 흐르고 흐르다가 다시 머무르는 이상한 발걸음”(김언 시인)으로 세계의 틈과 경계를 짚어가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렇듯 지난 4년, 꾸준히 주목받아온 시편을 포함해 총 42편의 시와 앞뒤로 각 4장, 19장의 흑백 사진을 더해 ‘이미지+텍스트+이미지’의 특별한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구성으로 신작 시집을 선보이게 되었다.
“시공간을, 언어를, 이름을, 몸을 선뜻 가로지르는 안태운의 시”(홍성희 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독자로 하여금 혼잣말하듯 산책하듯 보이는 것을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유영하고 발견하는 화자의 곁에서 그의 걸음걸음을 함께하게 한다. 일상성과 계절감이 잘 드러나는 장면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노스탤지어는 “그날이 훌쩍 지나 이제 그 모든 일이 과거라는 게 놀라워서, 지금이라는 게. 그리고 나는 그리워하고 있구나”(「경주」)라는, 아련한 듯 담담한 듯한 화자의 태도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한다. 그러면서 “이 빗소리에서 저 빗소리까지의 공간감. 거기서 나는 생겨나나”(「빗소리」)라는 안태운 시인 특유의 ‘공간감’, ‘장소성’에, “흘러서 거기 잠깐 머무는 것들”(「영화」), 요컨대 인간-비인간-사물을 망라한 개체와 종을 향한 고민에 마음을 맞대보게도 한다.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_「하오」 전문
시집 초입에 실린 이 시는 시인이 가장 최근에 쓴 시다. 안태운의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들과 몸짓들이 이 한 편 곳곳에 담겨 있다. 그의 시는 ‘리듬’과 ‘흐름’이라는 키워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바, ‘울다’ ‘있다’ ‘했다’ ‘날아들었다’ ‘퍼져나간다’의 앞뒤에 ‘놀았다오’ ‘물었다오’ ‘불렀다오’ ‘망설였다오’와 같이 종결어미가 변형된 시구가 놓이면서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 리듬감이 형성된다. 마치 누군가의 내레이션과 배경으로 흐르는 장면들이 공감각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그 장면은 선형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연상 작용을 따르는 듯하다. ‘당신’으로 지칭되는 대상 역시 하나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마저 고정된 부표가 아닌, 어디로 어떻게 흘러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모르는 움직임의 일부인 것 같다.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 것처럼, 어떤 “기억의 덩어리”가 어디서 어떻게 날아들지 모르는 것처럼. “문득 그 계절이 되는.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곳의 담벼락을 거닐고 있었는데 문득 그 계절을 걷게 되면 내게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고 나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고…… 놀라서 걷는 걸음이 다음 걸음이 되는”(「문득 그 계절이 되는」) 것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걸음이 이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며,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가 흘러간다. 탄생과 죽음이 그 흐름의 마디마디에 새겨진다. 시인이 시를 쓰고, 멈추고, 다시 쓰는 일 또한 그럴 것이다.
안태운 시인이 첫 시집부터 이번 시집까지 인간(동물)적인 것과 비인간동물적인 것, 인간의 삶과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간성’ ‘동물성’ ‘사물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제각각 능동적이며 또한 동등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천착은 이번 시집에서도 빛난다.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에 대해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 장면과 감정이 낯설어지고” 그 일이 반복될수록 그에 설레거나, 무언가 각오하게 되거나, 께름칙함이나 상충됨을 느끼는 것. 동물원의 동물은 직업이 있는 동물이라 말할 수 있고 그들은 인간을 피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고, 한편 그 동물원에서 일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있으며 그것은 화자에게 여러 양가감정을 느끼게 한다.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다고도 감각하면서”. 비인간동물을 향한 어떤 유의 애틋함은 역시 인간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해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당장 해볼 수 있는 게 있을까, 멀리서라도
그러므로 오늘은 절멸한 생물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어보는 시간을 가졌죠 생김새를 떠올려보며 오랫동안
……
랩스 프린지 림드 청개구리(Ecnomiohyla rabborum)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Melomys rubicola)
포오울리(Melamprosops phaeosoma)
크리스마스섬집박쥐(Pipistrellus murrayi)
콰가(Equus quagga quagga)
세실부전나비(Glaucopsyche xerces)
스텔러바다소(Hydrodamalis gigas)
타이완구름표범(Neofelis nebulosa)
(……)
나는 한 인간 개체의 생애 동안 한 종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숱한 종이 절멸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는데
그 시공간을 오랫동안 가늠해보다가 혜량할 수 없다,
라고 천천히 발음해보았는데
그런 내 인간의 몸과 마음을 낯설어하면서요
몸과 마음의 상실에 대해서
내 몸과 마음뿐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종뿐 아니라 다른 생물체의 대대손손의 상실에 대해 혜량할 수 없었는데요
_「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에서
동식물이 자연도태보다 500배 빠르게 절멸하고 있는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에서 “가끔 무언가를 끼적이며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낭독하고 발화하며 그날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같은 시에서), 그건 ‘인간의 언어’로 명명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그 종의 이름들을 되뇌는 것처럼 막막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사랑하게 놔둬도 좋을까 사랑이/ 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굴러가라 하면 잘 굴러서/ 놓여 있는 사랑이라니// 어딘가에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흘러서 또 어딘가에 닿는다면”(「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그런 사랑이」) 하는 바람처럼, ‘사랑’이라는 인간의 모호한 언어가 구체적인 행위로 굴러가고 닿아서 영향을 주고받고 어우러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마땅히 골몰해야 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혼자 하면 소박했을 생각들이, 시로 쓰이고 읽히고 거듭 읽히며 퍼져나가고 커지는 일 또한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겨울, 기억하려고 낭독회에 함께 모여 있었고
어느 봄,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굴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들며 꿈을 꾸었고
어느 여름, 조카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타고 가는 중학생을 보며 그는 내 과거가 아니라 조카의 미래라고 문득 여겨졌고
팔랑개비를 만들어보았고
깨어난다
어느 가을, 거울의 실금을 눈치챘고
어느 겨울, 날개응애와 애꽃벌
스치기
어느 봄, 옛 기억 속 장면에서는 나를 삼인칭으로 인식하게 되고
어느 여름, 끝말잇기를 하는 인간
아이의 냄새를 맡는다
아이가 냄새를 맡는다
어느 가을, 반딧불이와 노루와 버들치를 알았다
어느 겨울, 사슴벌레와 망초와 물범을 알았다
모습들
(……)
몸짓들
다르고 같다는 걸 알았다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어느 날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는 우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드넓어지는 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하염없었다
그것
흐르는 강물
둘레
산란과 예감
탄성
감각들
우연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되돌아온다
기척이 스민다
_「기억 몸짓」에서
‘나’가 대면하는 과거 ‘어느’ 계절의 기억들. 그것이 아이(‘조카’)를 알고부터는 ‘아이의 미래’로 대체된다. “기억 속 장면”에서 ‘나’는 “삼인칭으로 인식”되고 ‘어느 봄과 여름’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과거의 계절에서 도래할 미래의 모든 계절로 펼쳐진다. “아이의 냄새를 맡”자 “아이가 냄새를 맡는다”. 미래의 아이는 “어느 가을, 반딧불이와 노루와 버들치”를, “어느 겨울, 사슴벌레와 망초와 물범을 알”아가리라. 우리 존재의 “몸짓들”이 “다르고 같다는 걸”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할 수 있고,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이렇듯 안태운의 “시간”은 “흐른다 되돌아온다”. 장면들, 모습들, 감각들, 몸짓들, 그리고 기억들과 함께. 반복적이고 순환적으로, 그리고 재귀적으로. 더는 ‘나’만의 것, ‘과거~현재’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미래’의 것으로서. “하염없”이.
“그렇게 내가 미래의 아이를 안아주었으면”(「아이와」) 하는 마음. “행동을 하면 기억이 되고 과거의 기억이 나면 머무르고 인간의 기억이 미래 기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몸짓 기억」)하는, “기억하는 게 미래 같”(「돌과 구름」다 생각하는 사유 방식은 인과적 시간성에서 동시적 시간성으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킨다. 그러한 사유는 미래를 기억하는 일을 통해 현재를 다르게 보고 변화하게 할 가능성을 포함하며, 그 어떤 존재도 고립되거나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유연하게 운용돼 “스며들어 지속”(「몸짓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시인 안태운이 “어느 날에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지지 않”(‘시인의 말’)는 이유일지 모른다.
작가 소개
안태운
2014년 『문예중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산책하는 사람에게』가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목 차
시인의 말
여울/ 하오/ 문득 그 계절이 되는/ 아이와/ 공에 대해서라면/ 솔방울/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호랑/ 기러기보자기 연습/ 오송/ 접면/ 다음 숏/ 금일/ 경주/ 잔디를 방안으로/ 얌 연습/ 불광천, 여름/ 그날의 빛 날씨/ 염화칼슘 보관함/ 빗소리/ 기억 몸짓/ 몸짓 기억/ 눈언저리의 솔잎들/ 호우 몸짓/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 의성어 생김새/ 의태어 만들어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타고 가는/ 모락모락/ 통일 시/ 눈석임물/ 겨울에 여름 이미지/ 여름에 겨울 이미지/ 영화/ 우리 개의 놀라운 점/ 산서/ 합정/ 단소 소리/ 돌과 구름/ 여름에 어울리는 옷 사람/ 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그런 사랑이/ 백로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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