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언제든 떨쳐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을
끈덕진 공포감이 차오른다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는 김인숙 단편의 장르적 묘미!
1983년 등단한 이래 40여 년간 왕성한 작품활동을 지속하며 화려한 이력을 쌓아온 소설가 김인숙의 신작 소설집 『물속의 입』이 출간되었다. 독특하게도 이번 소설집은 ‘미스터리‧호러 단편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김인숙에게 유수의 문학상을 안겨준 값진 수상작들과 작가의 최근작을 한데 모아 읽을 때 발견되는 장르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김인숙 단편문학을 아우르는 제1의 특징이자 가장 강렬한 매력은 단연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서스펜스다. 그런데 그간 김인숙의 서스펜스는 ‘일상의 표층을 뚫고 나오는 인생의 비의’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로서 문학적 가치를 공인받곤 했다. 김인숙 소설의 깊고 둔중한 주제의식에 다다르는 데 서스펜스가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작품이 설정한 목적지에 시선을 고정하느라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독서의 즐거움이 다소 가려져왔던 것은 아닐까.
『물속의 입』은 김인숙 단편이 지닌 서스펜스를 오롯이 음미하는 독서 체험을 선사하고자 기획되었다. 아직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단편을 기계적으로 취합하는 대신 미스터리 성격이 뚜렷하면서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자작나무 숲」(2023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그해 여름의 수기」(2020 오영수문학상 수상작) 등을 선별해 수록하였으며,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나 이 단편선을 통해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는 단편 「빈집」(2012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을 재수록했다. 또한 작가가 2023년 가을부터 단편선의 콘셉트에 맞추어 집필한 미발표 신작들을 대대적으로 선보인다.
김인숙 소설의 미스터리한 매력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단편선의 포문을 여는 작품은 「자작나무 숲」이다. 이 단편은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하려는 손녀딸의 움직임으로 시작되며 첫머리에서부터 충격을 안긴다. 집안을 쓰레기로 가득 채우고 삶의 부산물 같은 감정들도 꼭꼭 끌어안고 살았던 ‘호더’ 할머니의 유품들 사이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반전에 대한 예감 때문에 시종 긴장감이 유지된다.
「자작나무 숲」의 ‘집’ ‘상속’ ‘반전’이라는 키워드는 다음 수록작인 「빈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수십 년을 함께 살며 속속들이 알아온 남편에 대한 증오와 사랑을 털어놓는 교양 있는 아내의 목소리와, 그런 아내에게 철저히 숨겨온 남편의 섬ㅤㅉㅣㅅ한 비밀을 나란히 놓으며 “인간 본연의 심연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있는 소설”이라 평해진 이 작품은 장르적 읽기를 시도할 때 또 한번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앞선 두 작품 속 인물과 언뜻 겹쳐 보이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후 9편의 소설들은 ‘물’과 ‘죽음’의 이미지로 수렴되며 연작을 이룬다. 비밀스러운 섬 ‘하인도’와 섬뜩한 환상성을 지닌 건물 ‘호텔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독립적이고도 유기적인 짧은 이야기들은 김인숙 소설세계의 한층 넓어진 지평을 생생히 조망하게 해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의 작품을 모티브로 삼은 범죄 사건이 벌어지는 단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이 연작의 복선이자 열쇠 역할을 한다. 정석적인 추리 서사와 김인숙 특유의 착란적인 호러 무드를 접목시킨 이 소설들에는 음습하고 서늘한 비극이 물속의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2023년 발표한 장편 추리소설 『더 게임』의 전직 형사 안찬기가 재등장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점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연작 뒤편에 배치된 두 단편은 김인숙 단편에서 서스펜스가 작동해온 방식을 되새겨보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소송」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두 형제가 애써 감추려 하지만 각자의 죄에 따른 심판의 순간마다 불쑥 내보이고 마는 비겁한 본성을 포착하고, 단편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수작 「그해 여름의 수기」는 수해로 가족을 잃은 여름날 한 소녀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시공이 뒤틀린 통로로 빠져버리는 초자연현상으로 형상화하며 오묘하고 신비로운 장면을 탄생시킨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선연한 감각은 먼 훗날 그 첫사랑 상대가 비루한 인생에 발이 ‘빠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슬픔과 오버랩되며 격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물속의 입』을 읽는 여정은 촘촘하게 짜인 사건과 트릭이 선사하는 긴박감에서 출발하여 환상과 착란으로 부풀어가는 공포를 지나 인간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감동으로 마무리된다. 외부 세계에서 우연히 벌어진 듯 보이던 갈등을 인간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갈등의 씨앗 앞으로 기어이 들이밀어 보일 때 생성되는 서스펜스. 외부의 사건과 내부의 정동을 꿰는 이 한 땀의 서스펜스로 인해 김인숙 소설의 인물들도, 독자들도 이야기에 꿰여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마치 ‘언제든 원할 때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절대로 떠날 수는 없는’ 공간인 호텔 캘리포니아처럼, 이 책의 강렬한 잔상은 독서를 마친 후로도 오래도록 뇌리를 떠돌며 일상을 문득 긴장시킬 것이다.
작가 소개
김인숙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꽃의 기억』 『봉지』 『소현』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더 게임』, 중편소설 『벚꽃의 우주』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목 차
자작나무 숲 _007
빈집 _037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_065
물속의 입 _125
호텔 캘리포니아 _139
콘시어지 _157
탐정 안찬기 _165
여기, 무슨 일이 있나요 _183
돌의 심리학 _207
유카 _219
섬 _249
소송 _255
그해 여름의 수기 _283
발문|강화길(소설가)
그는 옛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_311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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