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장편소설 『침묵의 비망록』은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의 ‘4·3’ 이야기로 풍부하고 생생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매몰된 과거와 현재의 기억, 기록의 숨은 그림자 찾기다. 작품은 2012년을 현재 시점으로, 마을지 ‘4·3’ 집필자인 김장수(80세)와 송령이골 무장대 합장묘의 종손 역할을 하는 아들 송철을 앞세운 의귀리 ‘4·3’ 전후사를 얼개로 한 시간 여행이다. 김장수, 그리고 4촌 형 김장원과 그 가족, 무장대 무덤과 현의합장묘, ‘4·3’ 희생자에서 제외돼 국외자(局外者)로 내몰린 이른바 ‘수뇌급 인물’ 이야기가 중심축이다.
옷귀 마을의 ‘4ㆍ3’은 제2연대 제1대대 제2중대가 주둔한 의귀국민학교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창고는 그날그날 토벌작전 과정에 체포된 지역 주민들을 하룻밤씩 가두는 유치장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백여 미터 떨어진 ‘학교 동녘밭’에서 집단학살됐다. 현의합장묘, 그리고 ‘폭도무덤’ 혹은 ‘반란군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송령이골 무장대 묘’는 제주섬 전체를 아우르는 아픔과 갈등이 강렬하게 응축된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자 실체로 존재한다.
2012년 현재 시점인 소설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부터 2012년 현재에 이르는 70여 년의 긴 시간에 걸쳐 서사가 진행된다. 이처럼 긴 시대적 배경에 더하여, 4·3을 전후로 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의 방대한 이야기를 작품 안에 유기적으로 엮은 이야기는 김장수, 그의 사촌형 김장원, 그리고 김장수의 아들 송철 세 사람의 주요 인물을 통해 전개된다.
주인공인 김장수는 스토리 전체를 종횡으로 엮어내는 중심 역할을, 김장원과 송철은 작가의 시점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작가는 김장원의 시점을 통해 해방 전후로부터 4·3 직전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김장원은 일제강점기 말부터 총파업 무렵까지 면서기를 한 인물로 해방 후 사회운동과 옥살이를 하다가 4·3 발발 직후 출옥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입산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사망한다. 그의 이런 삶의 이력을 바탕으로 작가는 일제강점기 말과 4·3 초반까지의 제주도 상황, 미군정하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 특히 남원면(현 남원읍)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제주 읍면 지역의 사회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김장수는 ’의귀리 전투‘의 산 증인이다. 그는 토벌대의 총에 아버지와 조부모를 잃고, 남은 가족과 함께 산으로 도피했다가 붙잡혀 취사담당을 하는 누나와 함께 임시 군 주둔지인 학교에서 심부름꾼(무등병 꼬마병사)으로 생활하던 중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전투‘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다. 이처럼 그는 가히 운명적인 생애를 살아온 인물이다. 평생 교직에 헌신한 교사이자 수필가이면서 4·3의 진실을 찾고자 수십 년 동안 증언 채록하고 제주인의 삶과 역사를 탐구하는 데 열정을 바쳐온 실천가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열여섯 살인 그의 눈을 통해 당시 전투의 긴박한 상황, 주민 집단학살 및 집단 매장, 그리고 사살된 무장대들의 시신 매장 과정을 상세하게 증언하기도 한다.
김장수의 아들 송철은 시인이자 사회운동가로, 4·3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그를 통해 1980년대 대학가 상황, 제주대학교의 ‘4·3분향소 사건’, 6월 항쟁과 청년 지식인층의 사회운동, 그리고 최근 젊은 예술인들 중심으로 시작된 송령이골 무장대 묘역 돌보기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에서 제주섬 전체를 아우르는 아픔과 갈등이 강렬하게 응축된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자 실체로 존재하는 두 무덤 가운데 ‘현의합장묘’는 우여곡절 끝에 묘역이 새롭게 단장됐지만 ‘송령이골 무장대 묘’는 버려진 채로 있다. 1994년 그 존재가 처음 세상에 드러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곳의 시신들은 아직도 버려진 채 국외자로 남아 있다. 1949년 1월 한날한시에 사살된 51구의 시신들은 한 구덩이에 쓸려서 묻히고 난 그날 이후, 여전히 한덩어리로 뒤엉킨 채 길고 긴 잠에 빠져 있다.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존재가 아닌 채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산 자들의 침묵이 공모하여 암매장해버린 ‘침묵의 무덤’ ‘망각의 무덤’이다. 하지만 김장수에게 그것은 실재하는 무덤이다. 그에게 ‘의귀리 현의합장묘’와 무연묘 상태의 ‘송령이골 무장대 합장묘’는 양달과 응달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김장수에게는 반드시 할 일이 남아 있다. 그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50여 구의 젊은 영혼들에게 제 이름을 찾아주는 일, 그들을 기억하는 가족한테 그들의 삭은 뼛조각 하나만이라도 되돌려주는 일,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 김장수의 사명이면서도 고시홍 작가가 침묵의 묵시록을 써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침묵의 비망록』은 우리들에게 ‘4·3’ 정신으로 포장된 ‘화해, 상생, 인권, 평화’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이 순간 우리는 진정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작은 무덤 하나조차 외면하고 아예 존재하고 않는 양 고개를 돌린 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라는 소설의 울림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고시홍
제주도 출생. 1983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대통령의 손수건], [계명의 도시], [물음표의 사슬], [그래도 그게 아니다], 그 외 공동편저 [고려사 탐라록]이 있음. 제주4·3희생자 추가진상조사자문위원, 제주4·3 70년사 [어둠에서 빛으로] 편집위원장 등을 지냄. 탐라문화상 수상.
목 차
제1부 기억의 머들 / 7
제2부 가죽가방 / 95
제3부 거친오름의 까마귀 / 199
제4부 송령이골 / 249
제5부 도랑춤 / 293
■발문
침묵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
-두 개의 무덤 / 임철우(소설가) / 317
■작가의 후일담 / 336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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