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불시착을 한 것 같은데. 우리는 지리에 밝았다.”
시작(詩作) 26년
순정한 시인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말들의 경로와 역사
26년이라는 긴 시간, 여념이 없이 시적 여정을 이어온 신해욱의 다섯 번째 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가 출간됐다. 1998년 세계일보로 등단한 이후 시집 『간결한 배치』(2005), 『생물성』(2009), 『syzygy』(2014), 『무족영원』(2019)을 차례로 경유하며 신해욱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방가르드를 보여주었다. “최대한의 사유를 가장 간결한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손과 “인간관계의 낯선 심층을 투시”(제8회 김현문학패 심사평)하는 눈을 장착한 시인은 5년 만의 신작 시집에서 존재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나드는 시 49편으로 언어와 세계, 그 가장자리를 깊이 탐구하고 성찰한다.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
그 밤에 사로잡혀
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전문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의 이정표로 시집 초입에 놓인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를 들여다본다. 응당 있어야 할 ‘그 밤’ 대신 ‘이 밤’이 여기 있다. 없는 ‘그 밤’이 ‘나’의 머리 꼭뒤를 붙드는지 ‘이 밤’은 어지럽다. 이때 들리는 건 하나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이고, 다른 하나는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이다. 수런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소리, 괴로움을 차례차례 쓸어버리는 소리다. 이 시의 끝엔 “바닥을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라는 구절이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로 변주되어 놓인다. 마치 글자들이 비질에 밀려나 지워지는 중 같다. 빗자루질은 세속의 오물을 쓸어 내는 종교적인 행위이다. 비로 바닥을 쓸어 ‘이 밤’을 돌파하는 ‘나’가 시 안에 있다면 시 밖에는 어떤 경지에 이를 때까지 문장과 씨름하며 시쓰기를 계속하는 시인이 있다. 이 시에 실린 ‘리듬’과 ‘움직임’은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수행에 동참하게 하며 이번 시집 전반을 가동한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아름다운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할머니들
펼치면 넓어지는 것
이야기 속의 벌판은 넓었고
멈출 수가 없었지
벌판엔 없는 것이 없었고
나를 좀 끼워줄래
나를 끼워주는 할머니들
놓친 대목에 헝겊을 덧대며
할머니들 먼 훗날에
나를 숨겨주는 꼬부랑 할머니들
할머니들 쉬지 않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꿰매어
자장자장 벌판을 덮어주는 할머니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전문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가 두드렸다는 듯이. 주문이 통했다는 듯이”(「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 스르르 열린다. 새로운 세기의 시간에 접속 가능한 신해욱의 발명품이다. 할머니의 뒤를 밟다가 할머니의 머리를 뒤집어쓸 수도,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쓰러져 낭패를 맛볼 수도 있다. 요절한 어우동에게 소매를 붙잡혀 움직일 수 없어지는 순간도 오고, 구중궁궐의 규방에 앉아 바늘잎으로 하루를 이틀로 쪼개는 겨울밤이 이어질 수도 있다. 시에서 시로 건너갈 때마다 새로운 장면 속에 우리는 어리둥절 깨어난다. 과연 “춘몽에 취한”(「레닌은 겨울에 죽었다」) 것일까. “허깨비의 속삭임”에 홀린 것일까. 존재의 경계는 부드럽게 허물어지며 “감정의 붐빔”과 “소외의 쓰라림”(이상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이 드러난다.
시집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신해욱의 시 안에서 단어와 단어는 서로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이내 충돌하며 서로를 파괴하고 독자는 행과 연을 읽어 내려갈수록 안정된 의미의 세계로부터 멀어진다”면서 그의 시가 “대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골몰하기보다 재현과 대상 자체를 떠나는 쪽을 택”(이상 해설 「여름의 열반」)함으로써 제 몸을 갱신한다고 평한다.
시집은 다섯 개 부로 나뉘어 있다. 부마다의 단차를 고려해 찬찬하게 배치된 시들은 책을 받친 손을 뗄 수 없게 한다. “온갖 공상을 주조하”(「황금자원」)며 시인은 활보한다. 신해욱의 뒤를 밟을 때에는 기존의 독법을 잊고 “무작정 맨발”로 “부자유를 잃고”(「자율미행」) 나아감이 좋다. “마디마디 외로운 것“(「황금자원」)이 만져진다. 시집을 읽다가 이대로 “백발이 되어버리”(「애정틈진문」)고 싶다. 높고 위태로운 목욕탕의 굴뚝부터 녹색 물에 잠긴 저지대까지 “아름다운 기분에 떠밀려 힘차게 추락할 것만 같”다. 손등에 코를 대면 “은밀하고 어리석은 삶의 냄새”(이상 「오감도」)와 “죽은 동물의 냄새”(「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가 뒤섞여 난다.
시는 예술이다. 예술은 우리 삶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세속으로부터 날아올라 현실의 삶을 초과하는 층위로 나아간다. 여기서 잠시, 누구나 자연스럽게 수긍할 법한 이 문장들의 사이에 잠시 머물러보자. 무음으로 처리된 물음표들이 득실거린다. 시는 어떻게 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한 탈출 욕망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현실을 초과한 이후 시가 마주하게 되는 국면은 어떠한 모습인가? 신해욱의 다섯 번째 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는 사반세기 동안 축척해온 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메타시들의 (그러나 메타시의 모습을 하지 않은) 모음으로, 위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제출하며 스스로를 초월하고 시 아닌 것으로 나아간다.
― 해설 「여름의 열반」에서
시집 제목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지난 시집 시인의 말에 쓰인 구절 “자연의 가장자리”를 가져와 시인은 시를 4편 썼고 모두 이번 시집에 수록했다. 시인은 책 이름에 대해 “인간의 말을 활용한 작업이 ‘自然’에 속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자리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일종의 ‘가장자리 지리지’로서 시집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출간을 앞두고 한 잡지에 발표한 산문에서 이런 말도 전했다. “제목을 이렇게 정하고 보니 ‘자연’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自然. 스스로 자. 그럴 연. 스스로 그러하다. 연원이 있어 그러한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어 그러한 것도 아닌, 그냥 그러한 상태. 그냥 그러해서 그러하다는 걸 잊게 만드는 상태. 있으나 마나 말하나 마나인 상태. 지향도 실체도 없는 이 무색무취의 상태는 도무지 명사로 표현될 수 없을 것 같은데 ‘自然’은 명사가 되었다. 소리글자인 한글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한글로 음만 옮겨 적으면 뜻이 가려진다. ‘자연’이 ‘自然’을 보자기처럼 감싼다는 느낌을 받는다. 보자기보다는 피부에 가까울까. 뜻의 내장, 혈관, 근육 같은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헤쳐지지 않도록, 흐트러지지 않도록, 기호는 의미를 품으면서 의미를 가린다. 의미의 외설로부터 말을 보호한다. 보호함으로써 살게 하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숨통을 조른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신해욱을 “자기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 말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는 자연이라는 단어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 새로운 시적 형식과 의미를 모색하며 시쓰기의 본질을 끈질기게 파고든 시인의 순정어린 결과물이다.
즐거운 일이다. 쓰고 싶은 것만 쓴다는 건. 그러나 쓰고 싶은 것만 쓰면서 말이 되게 쓰는 건…… 즐겁지만은 않다. 말이 되게 해야 한다. 시는 말로 이루어졌으니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면서, 서사에 기대지 않으면서, 정합성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인과율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어떤 말이 되게 할까. 쓰고 싶은 것만을 쓰면서 말이 되게 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탐색하는 자리. 쓰고 싶지 않은 건 다 빼버리고도 말이 되는 마지노선을 더듬는 자리. 즐거움으로 출발하였으나 즐거움의 뒤로 지리멸렬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 시가 아닌, 시인의 자리.
― 산문 「연이와 버들도령」에서
신해욱은 정직하게 정진한다. 쓰기를 추동하는 ‘강력한 자력과 자기장을 가진 말’을 모아 시를 짓고 비로소 이 시집을 내놓는다. 쓰고 싶은 것을 쓰면서 말이 되게 하는 노력, 형식과 내용의 최상의 조화를 찾으려는 애씀, “도구로서의 죽은 상태에서 벗어나, 말이 말로서 숨을 쉬도록, 혈색이 돌도록, 전류를 흘려”(산문 「연이와 버들도령」) 보내는 시인의 성심이 깃들어 있다.
말의 죽음을 인도함과 동시에 시쓰기에 자기 자신을 바쳐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신해욱의 시는 그것을 읽는 독자 역시 살아 있는 채로 작은 죽음과 새로 태어남을, 그리고 신성을 경험하게 한다. 시인의 손끝에서 생장한 말의 가지들은 “나무에서 영원까지” 가닿는다. 가지가지의 구멍으로 “울창한 미래의 노래를. 미래의 늦은 화음을”(이상 「둔기로 얻어맞았을 리 없음」) 들려준다. “내쉬는 숨과 함께 무너지는 형체”(「황금자원」)를, “펼치면 사라지는 것. 만지면 부서지는 것.”(「즉자의 돌」)을 보여준다. 신해욱 시는 새로운 현재에 불시착해 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의 아찔한 시차 속을 한참 헤매다 깨면 우리의 커다란 손바닥에는 쑥물이 짙게 남으리라.
비가 왔다 곡우였다
거름은 나무의 것
모이는 새의 것
우리는 먹이를 먹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에 들어
먹이는 우리의 것
우리의 먹이를 먹었다
촉촉하구나 촉촉하다
촉촉한 등은 개구리의 것
촉촉한 흙은 지렁이의 것
미끄러지며 목을 넘어가는
먹이는 우리의 것
누가 먹던 우리의 것
우리는 기분이 들떴다
우리는 잇몸도 들떴지
혀는 요망하고
보드랍구나 혀에 닿는
혀 밑의 부끄러운 것
곡우였다 흡족했다
거름은 나무의 것
삶은 자연의 것
못물은 모의 것
촉촉한 혀는 우리의 것
우리는 입술을 훔쳤다
우리는 입을 벌렸다
넘치는 못물에 대견한 마음을 비추며
혓바늘이 돋은 혓바닥을 자랑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전문
작가 소개
신해욱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간결한 배치』 『생물성』 『syzygy』 『무족영원』, 소설 『해몽전파사』, 산문집 『비성년열전』 『일인용 책』 『창밖을 본다』 등을 냈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자율 미행
애정틈진문
초
카운트
슈샤인
아웃렛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
투어
2부
오감도
귀부인과 할머니
로케이션
속이 깊은 집
떡 하나를
유머레스크
앙코르
도마를 말리자
호산나
의류와 포유류
네거티브 사운드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3부
숨은열
레닌은 겨울에 죽었다
종말 처리
행잉 게임
컨택트
황금자원
피날레
숨
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
레닌은 맨홀에 묻혔다
화생방
레닌은 음력에 죽었다
4부
장승의 수수께끼
끼어드는 글자 而
와장창 깨지 마시오
즉자의 돌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목욕탕의 굴뚝이 있는 풍경
5부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수상 극장과 미지의 정경
재의 수요일
둔기로 얻어맞았을 리 없음
망향
더미 헤드
환등 환상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크로마키 스크린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해설
「여름의 열반」(전승민)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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