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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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명호
출판사항한길사, 발행일:2024/09/09
형태사항p.569 A5판:21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3567861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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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개방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 개혁이다

“중국인은 싸움을 좋아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전쟁이 없어도 적은 있다.”_48쪽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도 19세기부터 100여 년을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동서 냉전체제가 형성되었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중국은 미국 탁구대표팀을 초청했다. 핑퐁외교다. 이를 서막으로 양국 관계 정상화의 막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중국은 미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소련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중국과 관계를 구축하면 소련과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물론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화해 분위기를 만든 일등 공신은 미국의 외교 황제 키신저와 중국 최고의 외교관 저우언라이다. 이들의 숨 막히는 007작전 덕에 미국과 중국은 적대 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도 시작된다. 수교 협정서 서명 잉크가 마르자마자 3주 후 덩샤오핑은 중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9일간 방문한다. 전 세계를 진동시킨 대형 사건이었다. 덩샤오핑은 몸살을 앓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챙길 것은 다 챙긴다.


장징궈의 두 아내와 아들 쌍둥이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는 소련 유학 시절에 만난 소련 부인과 3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장제스는 검소하고 나대지 않는 소련 며느리에게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총애했다. 이런 부인을 두고서도 장징궈는 삼민주의청년단 간부훈련반 1기 출신으로 젊고 예쁜 과부 장야뤄(章亞若)와 3년간 동거하면서 쌍둥이 아들을 낳는다.

장야뤄가 출산 후 6개월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장징궈의 최측근 왕셩이 쌍둥이 아들을 대만으로 데리고 나와 번듯하게 키워낸다. 장징궈의 3남 1녀 모두 불우한 생활을 했지만 내던져진 쌍둥이 형제는 외교계와 교육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한 명은 외교부장, 다른 한 명은 명문대 총장이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동북 쟁탈전

동북(만주)은 땅이 넓었다. 수력자원과 석유·석탄·금속의 매장량이 엄청났으며 철도망도 발달해 있었다. 중국의 변방이었던 동북은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는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다롄과 뤼순에서 창춘까지의 철도운영권을 거머쥔 일본은 동북에 국책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한다. 관동군이라는 철도수비대까지 거느린 만철은 일본 군국주의의 대중(對中) 정치·경제·문화 침투의 첫발을 의미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호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동북군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만주사변을 자작극으로 연출함으로써 15년간 계속된 중·일전쟁의 막이 오른다. 만주사변 배후에는 만철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만철은 일본 식민통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인재배양이나 경영방식에서는 뛰어났다. 재능만 있으면 남녀, 학력 불문이었다.

1932년 일본은 만주를 중국 본토와 역사적·지리적으로 별개의 지역으로 분리하고 인공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줄 국가 원수로 청(淸) 마지막 황제 푸이에게 눈독을 들인다.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맡아 푸이를 만주로 데려와 마음껏 조종한다. 푸이는 황제 소리를 듣기 위해 동북의 영토와 주권을 깡그리 일본에 내주고 일본 관동군은 14년간 푸이를 전면에 내세워 만주국을 간접 통치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만주에서 주도권을 잡은 장쉐량은 중국 최강의 부대 동북군을 지휘한다. 하지만 관동군에게 저항 한 번 못 하고 동북을 포기한 무저항장군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전면적인 만주사변으로 전개된다.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의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는 내가 내렸다. 괴물의 광적(狂的)인 행동을 예상 못 한 판단 착오였다.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_180쪽


일본의 생명선인 동북을 점령하라

1931년 9월, 광대한 동북을 점령한 일본의 만척(만주척식주식회사)은 만주 이민을 장려했다. 일본 영토에 일본인이 가는 것은 이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민을 개척민으로, 이민단은 개척단으로, 이민사업은 개척사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만주국은 일본 농민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다. 한때 음지에서 일했던 일본 남녀들에게는 신분세탁소였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원자탄이라는 괴물의 불구덩이에 무릎을 꿇은 일본은 개척단에게 집단 자살을 요구했고 살아남은 개척단원들은 중국 여인과 가정을 꾸리거나 중국 남자와 결혼해야 했다.

일본 이민과 개척단은 일본 침략정책의 도구였으며 중국인에게 재난을 안겨준 가해자(加害者)였고 일본 침략 전쟁의 수해자(受害者)였다.


문화 혼혈아 리샹란

관동군은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국책선전기관 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만영)를 설립하고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이사장에 취임해 문화예술 공작을 진두지휘한다. “만주국 14년간 만주의 낮은 관동군이 지배하고 밤은 아마카스의 천하였다”고 평가할 만큼 아마카스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마카스는 “선전영화는 우선 재미있고 교묘해야 한다”며 동양 제일의 영화제작 환경을 만들고 리샹란을 배우로 영입한다.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은 일본인 리샹란은 이름도 복잡하고 국적도 불분명했다. 리샹란, 야마구치 요시코, 리꼬랑, 이향란, 판수화(潘淑華)는 동일인이었다.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이고 성도 복잡하고 성장 배경도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만주국 존속 14년간 리샹란은 노래와 연기로 중국인을 홀리고 전선에 있는 일본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한몫했다. 리샹란은 한간(漢奸)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질 뻔했지만 일본인임이 증명되어 일본에 귀국해 참의원(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일생을 다룬 영화,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국·공 양당 전쟁터가 된 동북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약자가 강자로 변하는 것이 강자가 약자로 바뀌는 것보다 수월하다.”_360쪽

소련군이 철수하자 동북(만주)은 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터로 변한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어떤 나라를 건설할지를 주제로 평화회담을 열었지만 실제는 내전을 치르기 위한 시간 끌기 회담이었다.

동북의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린뱌오는 동북 문제는 중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오쩌둥도 이에 동의한다.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군의 두위밍과 잡군이나 다름없는 린뱌오의 팔로군이 슈수이허에서 전투를 벌인다. 린뱌오는 3일 만에 두위밍 군을 섬멸한다. 1차는 린뱌오, 2차와 3차는 천밍런, 3차는 린뱌오가 승리한다.


일본과 중국에 불어온 훈풍

“몰려오는 불길이 맹렬하다. 중요한 물건은 빨리 꺼내야 한다.

바람 그치기 기다렸다간 모두 재가 된다.”_435쪽

1952년 4월, 일본은 대만의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20년 가까이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자 일본도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중·일관계 정상화의 디딤돌은 랴오청즈가 이끈 ‘대일공작위원회’가 놓았다.

친대만파가 많은 일본 자민당은 대륙과의 관계 정상화만 지지했지 대만과의 단교는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과 수교를 주장하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중·일 관계가 긴밀해진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토목기사 출신으로 3류 잡지 기자를 한 다나카는 “무슨 일이건 뒷구멍으로 해야 효과가 있다. 공직자들이 썩었기 때문이다”라며 공식 라인은 배제시켰다.

핑퐁외교로 미·중관계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한 것처럼 중국은 발레외교로 핑퐁외교 못지않은 성과를 내려 했다. 쑨핑화를 단장으로 한 상하이발레단 208명을 일본에 보내 다나카의 방중을 앞당긴다.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다나카는 닉슨보다 거창한 영접을 받는다.


지식인의 향연

절세의 자유주의 사상가 인하이광은 젊은 지식인들의 우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를 지지하고 숭배했고 학문적으로는 진웨린의 지도를 받았다. 국민당 기관지『중앙일보』주필 인하이광은 민주와 인권을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옮겨온 녜화링은 잡지 『자유중국』에 참여하면서 인하이광과 같은 집에 살게 된다. 레이전은 잡지『자유중국』을 창간하면서 발행인에는 후스의 이름을 올렸다. 잡지는 젊은 군인들과 지식청년들을 열광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쉬푸관과 인하이광은 적이자 친구였다. 인하이광은 20년간 쉬푸관을 혐오했지만 자신이 아는 최상의 인물이라며 칭송한다. 반려자 샤쥔루도 쉬가 소개해준다. 1960년 대만경비총사령부(경총)는 자유주의자의 보루『자유중국』을 봉쇄하고 사장 레이전을 감옥으로 보낸다. 인하이광은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되며 녜화링도 실직자로 전락했다.

중국 최후의 순수 문학자이며 중국의 마지막 사대부 왕쩡치는 여성관이 유별났다.젊되 총명하고 병든 여자를 좋아했다. 진보적인 학생들의 집결지 서남연합대학 서양문학과 스쑹칭은 병태미를 풍겼다. 스쑹칭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이 있는 왕쩡치와 결혼한다. 헤밍웨이의 작품과 녜화링의 글을 좋아한 왕쩡치는 고랭지 감자연구소에서 감자와 자연을 스케치하며 고난과 화해했다.

중국 10대 보물 중 으뜸인 모공정(毛公鼎)을 목숨 걸고 지킨 천하의 기재(奇才) 예궁차오는 격조 넘치는 과학자 위안융시와 결혼한다. 위안융시는 예궁차오와 예충판이 사촌 남매가 아닌 남녀관계라는 소문 때문에 예궁차오와 완전히 결별한다.


대만의 백색공포

백색공포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만 국민을 억압했던 시대다. 1949년 대만대학과 대만사범대학 학생 사건부터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시작되는 1992년까지 국민당이 1당 독재했던 시대를 지칭한다. 그 시절 국민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만 전역의 감옥이 만원이었다. 초대 대만 행정장관 천이도 총탄 세례를 받았다. 철혈정치가 난무한 시대였다.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대독파의 대부 펑밍민은 국민당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투옥되지만 수상한 연유로 감옥을 탈출한다. 후스와 인하이광의 영향을 받은 리아오는 국민당의 언론 탄압에 대한 글을『문성』에 기고해 맹공을 퍼붓는다. 리아오도 철창신세를 진다. 하지만 리아오는 “문성 시대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일은 잊으라”며 이를 악물고 버틴다.

작가 소개

김명호

경상대・건국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있다. 10년 동안 중국의 대표적 언론출판기구인 ‘생활(生活)・독서(讀書)・신지(新知) 싼롄(三聯)’의 서울 측 대표를 지냈다. 20여 년간 중국을 오가며 ‘문화노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와 본인이 수집한 사진들을 바탕으로 『중국인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

목 차

1 미·중 관계 정상화

013 비밀 만남

033 유일한 합법 정부

057 미·중 수교

069 미국의 양다리

107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


2 동북 쟁탈전

121 대만 정치작전 대부 왕셩

139 장징궈의 두 아내

161 만주사변의 서막

171 무저항장군 장쉐량


3 혼돈에 빠진 만주

185 만주의 구세주

197 헌병대위 아마카스

207 만주국 집정 푸이 옹립

225 만주에 둥지 튼 일본 개척단

237 만몽은 세계평화의 고향

249 개척단의 이민과 최후

259 신분세탁소


4 문화 혼혈아

275 비극미 넘치는 리샹란

287 리샹란에 홀린 아마카스

303 만국통용 리샹란


5 국·공 양당의 전쟁터

327 시간 끌기 평화담판

343 린뱌오의 팔로군

355 동북 패권 쟁취

367 국·공 내전의 조종자

379 국·공전쟁 승리의 초석

395 계급 수여식


6 일본과 중국의 훈풍

411 리틀 쑨 웨이리황

429 영웅 떠난 세상

435 대일공작위원회 출범


7 지식인의 향연

461 젊은 지식인들의 우상

471 『자유중국』의 진정한 영혼

491 중국 최후의 사대부

503 천하의 기재(奇才) 예궁차오


8 백색 공포시대와 문성시대

519 대만 덮친 경제위기

531 백색공포

545 계엄령 시대

557 공자 77대 직계종손 쿵더청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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