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너도, 나도 다 비슷했던 거야.
그러니까 서로를 알아봤지.”
17년 만의 재회로 시작된
뒤틀린 욕망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
분당의 학원강사로 일하던 호림은 미성년 제자 호준과의 사건을 계기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문시에 오게 된다. 남편 승환과도 떨어져 지내며 부모의 집에서 근신 중에 있던 호림은 한때 가깝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 지양과 17년 만에 재회한다. 예전과 달라진 현재의 지양을 보며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겹겹이 쌓여가는 ‘우연들’은 호림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불편한 과거의 윤곽을 더듬어가도록 만든다.
“사실은 정말 궁금한 게 있었다. 지양이 자신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 침침했던 옛날의 자신과 아직도 단절하지 못한 거라면 무슨 일이든 더 할 수 있었다.” (35쪽)
17년 전,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안정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란 호림과 엄마의 투신자살 후 다양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전학생 지양은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이 우정은 단순하고 다정한 방향이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호림은 자신의 존재를 꾸며줄 수 있는 것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럴듯한 사연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뒤틀린 마음으로 지양을 시기하고 동시에 선망하는 호림의 욕망은 두 사람이 나눠 쓰기로 약속한 교환 일기장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교환 일기장을 만들어 자신의 부모를 욕하는 가사를 써서
서로에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59쪽)
“추악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서로에게 쉽게 던지지 못했던,
그러나 지극히 보편적인 세계를 향한 그 질문
과거와 현재 시점이 교차되며 이어지던 서사는 지양의 고등학생 딸 성연에게로 향한다. 호림은 자신과 연락이 끊긴 동안 어떤 사정으로 지양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단순한 미움을 넘어 지양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성연의 태도를 보며, 호림은 지양이 지나왔을 지난 시절에 대한 호기심 대신 성연에게 친모보다 더 좋은 엄마이자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한다.
“호림은 성연의 순수한 적의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 물론 성연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건, 그 엄마의 잘못이었다.” (78쪽)
이들 사이에 새로운 인물 영근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다시 한번 쉽게 피해 갈 수 없는 우연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호림은 자신과 안팎으로 갈등을 맺고 있는 남편 승환과 다른 매력을 가진 영근과 그동안 바라왔던 일탈을 실현하기로 한다. 그토록 욕망해 왔으나 한 번도 이룬 적 없던 아슬아슬한 관계를 맺던 호림은 자신과 영근, 성연과 이상적인 ‘대안 가족’이 되어감을 기뻐한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소탈하게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몽매하고 천박한 타인에게서 상처받았으나 다시금 사랑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어머니” “그들이 낳지 않았으나 그리하여 오히려 이성적인 애정을 줄 수 있는 어린 딸”로 구성된 가족은, 호림 자신을 반드시 특별한 삶의 서사로 데려가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호림은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았다. 자신의 계정을 염탐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너희가 그렇게 쫓아낸 것이 나에겐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하고 과시하길 원하는 마음.” (79쪽)
완벽하지만 인간적이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타인의 자식을 친딸처럼 여기는, 사랑으로 가득한 아내이자 여자. 소설은 호림을 통해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가족의 형태가 어떤 욕망의 결과물로 나타나는지 거침없이 펼쳐나간다. 호림을 비롯한 지양, 성연, 영근 모두 각자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을 기꺼이 수단으로 쓰고자 한다. 이때 성연의 혈육과 관련된 진실이 그들 사이에 충격적인 혼란을 불러오면서, 호림이 갖기 위해 악착같이 애써왔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기적이고 뒤틀린 욕망을 가진 인물들을 향해 일반적인 윤리를 논하지 않는다. 독자는 섣부른 판단은 보류한 채, 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과연 ‘어떻게 보이는지’ 응시하며,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에 흥미롭게 골몰하게 될 것이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애썼던 모든 순간이
서로를 겨누는 비극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우연을 경험한다. 현실에서 겪는 행복과 절망, 성취와 결핍이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우연으로 작동되었다고 믿는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런 믿음을 향해 묻는다. 외면하고 싶은 형태의 삶조차 우리 본연의 것이 아닌지, 그 모든 것을 우연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지를.
드러났거나 언젠가 드러나게 될 각자의 비밀이 여러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당장의 전개를 선뜻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러한 서사적 흥미는 다방면으로 구조의 완성도를 놓치지 않는 『우연이 아니었다』의 특징 중 하나다.
얽히고설킨 진실과 거짓이 인물들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까? 어떤 인물도 간단히 예단하거나 해석할 수 없음을 느낄 때,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서사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매 페이지마다 다음 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저돌적인 설재인식 세계를 『우연이 아니었다』에서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
‘새소설’은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입니다.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젊고 새로운 작품을 소개합니다.
작가 소개
설재인
1989년생. 주종 가리지 않지만, 날 때부터 배운 게 있어 어쩔 수 없이 가성비를 따진다. 하여 희석식 소주를 가장 많이 마신다. 단백질 함량이 많은 안주라면 다 좋아하며 혼술 및 반주를 즐기는 극강의 아재 입맛. 술자리의 사람이 많아질수록 흥미를 잃는다. 자신이 술을 왜 마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술을 오래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하루 세 시간 한다(프로 복서 라이센스 보유 중!).
2019년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사뭇 강펀치》, 장편소설《세 모양의 마음》《붉은 마스크》《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우리의 질량》《강한 견해》《내가 너에게 가면》《딜리트》《범람주의보》《캠프파이어》《소녀들은 참지 않아》《별빛 창창》《그 변기의 역학》《계란 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정성다함 생기부 수정단》, 연작소설 《월영시장》, 에세이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 등을 집필했다.
목 차
프롤로그: 어느 날의 메일
1부
2부
3부
에필로그: 어느 날의 집필 노트
작가의 말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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