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단단한 문장, 깊은 사유로 일궈낸 탁월한 소설 미학
정미경 작가는 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2001년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 누구 못지않게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소설집과 장편을 오고 간 그간의 결과물들은 읽는 이에게 늘 그 완성도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신작 『프랑스식 세탁소』 또한 하나같이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수작들로 채워져 있다.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는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그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프랑스인 요리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나’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지닌 여직원 ‘미란’에게 묘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만, 재단의 비리 의혹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게 되자 ‘나’가 가진 능력있고 도덕적인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을 두려워하는 미란을 은연중에 자살로 몰고 간다. 그런 그에게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으로 뜨거운 삶을 살다가 그 자부심을 훼손당하자 끝내 생을 포기한 프랑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는 번민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안온한 삶의 궤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에게 미란과 르와조의 순결함이나 열정 따위는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 현실과 소설이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나’와 ‘르와조’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절묘하게 하나로 휘감는다. 정미경의 소설은 진실과 거짓, 성찰과 자기기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한기욱, 추천사) 작가는 『프랑스식 세탁소』를 통해 우리에게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이 치열한 욕망의 시대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 우리가 믿는 것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작가의 사유는 그래서 비교적 차분한 소설의 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긴다.
그만해라.
울지 말라는 건지, 무릎을 문지르지 말라는 건지, 그녀의 삶에 던진 화두 같은 건지, 나도 모를 말이었다. 그녀의 팔 안쪽은 어린 쥐의 배내털처럼 보드라웠다. 그 느낌에 놀라 얼른 팔을 놓았던 것 같다. 한번도 내 앞에서 무언가를 우겨본 적이 없는 그녀가, 약간 튀어나온 눈으로 날 바라보며 우기듯, 앞뒤를 잘라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게 말했지.
사람들이 뭐라건…… 내겐 좋은 분이세요. 그거면 된 거죠.(265~66면)
첫번째 수록작 「남쪽 절」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설치작품 ‘남쪽 절(南寺, 미나미 테라)’을 소재로 삼았다. 철저한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체험에서 느끼는 낯설고 막막한 기분은 주인공 ‘김’의 심경에 부합한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1인 출판사로 독립한 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대필 사실을 숨겼다가 문화계에서 퇴출된 과거의 베스트셀러 작가 ‘백’과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 김에게 최소한의 신념과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내는 껄끄럽기만 한 존재이며, 지옥과도 같은 용산의 투쟁도 백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김 역시 심저에서는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발길을 돌리게 되는 ‘남쪽 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조심스레 걸어나가야 하며, 한 점의 빛이 곧 희망의 근거가 되는 가운데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작은 손길로 넘어지지 않게 되는 암흑이다. 이 기묘한 어둠은 현대인의 삶의 작동방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김이 막 계단을 올라서는데, 한 사람의 숨소리가 갑자기 도드라진다. 일정하지 않고, 토막 나고, 축축하다. 흐트러진 숨소리는 조금씩 더 거칠어진다. 우는 것일까, 설마. 흐느낌을 누르려 애쓰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완고한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김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익숙해진 들깨알 크기의 빛이 보이고, 그 빛이 벽 전체로 확산되면서 디귿자 모양의 문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걸어가고 문이 열린다. 개별성이 없는 푸르스름한 뒷모습들을 지켜보며 김은 주춤거렸다. 조금만 더, 여기 머물고 싶다. (38면)
안락한 일상의 한 꺼풀 아래에 전혀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인식은 「파견 근무」와 「타인의 삶」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파견 근무」의 화자인 ‘강’은 지방법원 판사이다. 최고의 엘리트로서 지역 유지들과 호의호식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중독된 도박의 세계에서 점차 삶이 파탄에 이른다. 그는 애초에 믿었던 철두철미한 법의 세계마저 다분히 판사의 재량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느끼며 끊임없이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상상만을 하게 된다. 이와 양상은 정반대이지만 「타인의 삶」의 인물들 또한 삶의 나락 앞에 놓인다. 의사인 ‘현규’와 결혼을 앞둔 ‘나’는 애인이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규는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다고 결연히 말하지만, 그 이면엔 모르핀 중독과 얽힌 사건이 있다. ‘나’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그 결정의 진정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일상에 부대끼며 위태롭게 서 있는 정미경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그 아름다움은 ‘예술’로, ‘꿈’이나 ‘소망’으로, 혹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변주된다. 「프랑스식 세탁소」의 르와조에게 순결한 요리의 세계가 지고한 미적 가치이기도 했던 것과 같이 그 아름다움은 인물들에게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표이다. 르와조에게, 그리고 「파견 근무」의 강에게 단순명료한 도박의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현실의 삶을 붕괴시킬지라도 말이다.
「울게 놔두세요」의 중심인물인 ‘K’는 탈북한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유치하고 가벼운 것들”을 마음껏 연주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단신으로 여러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가난과 편견으로 K는 날마다 좌절할 뿐이다. 남루한 현실 속에 K의 꿈도,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도 점차 멀어져간다. 「소년처럼」의 ‘박’은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지방으로 좌천된 중년 남성이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며 회사에서 무시당하는 박의 유일한 낙은 여성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는 일이다. 그 순수한 황홀함 밖의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치매에 걸려 끝없이 “어디냐?”고 묻는 어머니가 손에 쥐여준 초콜릿의 찝찔한 달콤함, 뱉어버리고 싶지만 이내 천천히 녹여먹고야 마는 체념 섞인 감정뿐이다.
그런 한편 「번지점프를 하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들을 다룬 작품이다. 소심하지만 순진한 남자친구와 점잖고 쿨한 중년의 미술관 대표 사이에서 묘한 갈등을 겪는 여대생 하은을 중심으로,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안함 속에서도 그들만 가질 수 있는 풋풋한 모습과 설레는 감정을 통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전한다.
해설을 쓴 이소연 평론가의 말처럼, 정미경의 소설은 생에 내장되어 있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운명 앞에 굴복하거나, 우연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들이 끝내 실패하거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나의 현실을 다시금 차분히 되새기게 된다. 『프랑스식 세탁소』는 이 작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문장들을 전하고 있는지, 이후로는 또 얼마나 더 단단하고 아름다워질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작가 소개
저 : 정미경
鄭美景
''남들은 절대 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여성작가다. 서사 구조의 고전적 안정성, 미묘한 정서를 전하는 섬세한 문체, 존재와 삶을 응시하는 강렬한 시선으로 우리 문단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1960년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감성과 지성, 내면과 서사의 반목을 훌륭하게 통합해 낸 『장밋빛 인생』으로 획일화된 문단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을 받으며 2002년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빛과 어둠의 미학을 바탕으로, 백야의 북구, 뭉크의 그림 등 이국정취로 이끌어가는 이향적인 공간의 시학과 더불어 아이러닉한 반전 구조로 와해되어가는 천재적 우상의 초상을 제시한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인간 존재의 허무, 그 황량함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천재의 몰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통해 선망과 경쟁의 대상으로서 자아의 욕망이 대리 투사된 자신의 거울상인 대상의 해체로 인한 자기 환멸의 허망한 반응과 내적 붕괴감을 뛰어난 서사기법을 바탕으로 그려낸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은밀한 성찰의 기획을 여로의 구조를 통해 뛰어나게 서사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밤이여, 나뉘어라」 외에 2008년 이효석문학상 추천 우수작인 「타인의 삶」, 2008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 「프랑스식 세탁소」, 「번지점프를 하다」,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장편소설『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의 작품을 썼다.
▣ 주요 목차
남쪽 절
파견 근무
울게 놔두세요
타인의 삶
번지점프를 하다
소년처럼
프랑스식 세탁소
해설/이소연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단단한 문장, 깊은 사유로 일궈낸 탁월한 소설 미학
정미경 작가는 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2001년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 누구 못지않게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소설집과 장편을 오고 간 그간의 결과물들은 읽는 이에게 늘 그 완성도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신작 『프랑스식 세탁소』 또한 하나같이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수작들로 채워져 있다.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는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그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프랑스인 요리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나’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지닌 여직원 ‘미란’에게 묘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만, 재단의 비리 의혹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게 되자 ‘나’가 가진 능력있고 도덕적인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을 두려워하는 미란을 은연중에 자살로 몰고 간다. 그런 그에게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으로 뜨거운 삶을 살다가 그 자부심을 훼손당하자 끝내 생을 포기한 프랑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는 번민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안온한 삶의 궤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에게 미란과 르와조의 순결함이나 열정 따위는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 현실과 소설이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나’와 ‘르와조’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절묘하게 하나로 휘감는다. 정미경의 소설은 진실과 거짓, 성찰과 자기기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한기욱, 추천사) 작가는 『프랑스식 세탁소』를 통해 우리에게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이 치열한 욕망의 시대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 우리가 믿는 것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작가의 사유는 그래서 비교적 차분한 소설의 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긴다.
그만해라.
울지 말라는 건지, 무릎을 문지르지 말라는 건지, 그녀의 삶에 던진 화두 같은 건지, 나도 모를 말이었다. 그녀의 팔 안쪽은 어린 쥐의 배내털처럼 보드라웠다. 그 느낌에 놀라 얼른 팔을 놓았던 것 같다. 한번도 내 앞에서 무언가를 우겨본 적이 없는 그녀가, 약간 튀어나온 눈으로 날 바라보며 우기듯, 앞뒤를 잘라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게 말했지.
사람들이 뭐라건…… 내겐 좋은 분이세요. 그거면 된 거죠.(265~66면)
첫번째 수록작 「남쪽 절」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설치작품 ‘남쪽 절(南寺, 미나미 테라)’을 소재로 삼았다. 철저한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체험에서 느끼는 낯설고 막막한 기분은 주인공 ‘김’의 심경에 부합한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1인 출판사로 독립한 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대필 사실을 숨겼다가 문화계에서 퇴출된 과거의 베스트셀러 작가 ‘백’과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 김에게 최소한의 신념과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내는 껄끄럽기만 한 존재이며, 지옥과도 같은 용산의 투쟁도 백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김 역시 심저에서는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발길을 돌리게 되는 ‘남쪽 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조심스레 걸어나가야 하며, 한 점의 빛이 곧 희망의 근거가 되는 가운데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작은 손길로 넘어지지 않게 되는 암흑이다. 이 기묘한 어둠은 현대인의 삶의 작동방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김이 막 계단을 올라서는데, 한 사람의 숨소리가 갑자기 도드라진다. 일정하지 않고, 토막 나고, 축축하다. 흐트러진 숨소리는 조금씩 더 거칠어진다. 우는 것일까, 설마. 흐느낌을 누르려 애쓰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완고한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김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익숙해진 들깨알 크기의 빛이 보이고, 그 빛이 벽 전체로 확산되면서 디귿자 모양의 문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걸어가고 문이 열린다. 개별성이 없는 푸르스름한 뒷모습들을 지켜보며 김은 주춤거렸다. 조금만 더, 여기 머물고 싶다. (38면)
안락한 일상의 한 꺼풀 아래에 전혀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인식은 「파견 근무」와 「타인의 삶」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파견 근무」의 화자인 ‘강’은 지방법원 판사이다. 최고의 엘리트로서 지역 유지들과 호의호식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중독된 도박의 세계에서 점차 삶이 파탄에 이른다. 그는 애초에 믿었던 철두철미한 법의 세계마저 다분히 판사의 재량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느끼며 끊임없이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상상만을 하게 된다. 이와 양상은 정반대이지만 「타인의 삶」의 인물들 또한 삶의 나락 앞에 놓인다. 의사인 ‘현규’와 결혼을 앞둔 ‘나’는 애인이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규는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다고 결연히 말하지만, 그 이면엔 모르핀 중독과 얽힌 사건이 있다. ‘나’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그 결정의 진정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일상에 부대끼며 위태롭게 서 있는 정미경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그 아름다움은 ‘예술’로, ‘꿈’이나 ‘소망’으로, 혹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변주된다. 「프랑스식 세탁소」의 르와조에게 순결한 요리의 세계가 지고한 미적 가치이기도 했던 것과 같이 그 아름다움은 인물들에게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표이다. 르와조에게, 그리고 「파견 근무」의 강에게 단순명료한 도박의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현실의 삶을 붕괴시킬지라도 말이다.
「울게 놔두세요」의 중심인물인 ‘K’는 탈북한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유치하고 가벼운 것들”을 마음껏 연주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단신으로 여러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가난과 편견으로 K는 날마다 좌절할 뿐이다. 남루한 현실 속에 K의 꿈도,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도 점차 멀어져간다. 「소년처럼」의 ‘박’은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지방으로 좌천된 중년 남성이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며 회사에서 무시당하는 박의 유일한 낙은 여성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는 일이다. 그 순수한 황홀함 밖의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치매에 걸려 끝없이 “어디냐?”고 묻는 어머니가 손에 쥐여준 초콜릿의 찝찔한 달콤함, 뱉어버리고 싶지만 이내 천천히 녹여먹고야 마는 체념 섞인 감정뿐이다.
그런 한편 「번지점프를 하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들을 다룬 작품이다. 소심하지만 순진한 남자친구와 점잖고 쿨한 중년의 미술관 대표 사이에서 묘한 갈등을 겪는 여대생 하은을 중심으로,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안함 속에서도 그들만 가질 수 있는 풋풋한 모습과 설레는 감정을 통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전한다.
해설을 쓴 이소연 평론가의 말처럼, 정미경의 소설은 생에 내장되어 있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운명 앞에 굴복하거나, 우연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들이 끝내 실패하거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나의 현실을 다시금 차분히 되새기게 된다. 『프랑스식 세탁소』는 이 작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문장들을 전하고 있는지, 이후로는 또 얼마나 더 단단하고 아름다워질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작가 소개
저 : 정미경
鄭美景
''남들은 절대 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여성작가다. 서사 구조의 고전적 안정성, 미묘한 정서를 전하는 섬세한 문체, 존재와 삶을 응시하는 강렬한 시선으로 우리 문단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1960년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감성과 지성, 내면과 서사의 반목을 훌륭하게 통합해 낸 『장밋빛 인생』으로 획일화된 문단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을 받으며 2002년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빛과 어둠의 미학을 바탕으로, 백야의 북구, 뭉크의 그림 등 이국정취로 이끌어가는 이향적인 공간의 시학과 더불어 아이러닉한 반전 구조로 와해되어가는 천재적 우상의 초상을 제시한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인간 존재의 허무, 그 황량함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천재의 몰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통해 선망과 경쟁의 대상으로서 자아의 욕망이 대리 투사된 자신의 거울상인 대상의 해체로 인한 자기 환멸의 허망한 반응과 내적 붕괴감을 뛰어난 서사기법을 바탕으로 그려낸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은밀한 성찰의 기획을 여로의 구조를 통해 뛰어나게 서사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밤이여, 나뉘어라」 외에 2008년 이효석문학상 추천 우수작인 「타인의 삶」, 2008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 「프랑스식 세탁소」, 「번지점프를 하다」,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장편소설『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의 작품을 썼다.
▣ 주요 목차
남쪽 절
파견 근무
울게 놔두세요
타인의 삶
번지점프를 하다
소년처럼
프랑스식 세탁소
해설/이소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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