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이 여름날 하늘 아래에서 땅의 등뼈를 느끼며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대지의 등뼈로 여겨졌던 것이다.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뿌리는 그가 타고 있는 큰 말의 잔등이 되고 혹은 요동치는 배의 갑판이 되었다 ─ 단단한 것이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떠도는 자기 마음을 끌어다 맬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당긴 그 마음을. 저녁나절 이 시간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사랑의 질풍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마음을. 그는 그 마음을 참나무에 묶었다. 거기 누워 있다 보면 그의 내면과 주위의 소란한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 본문 19쪽
의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에 대한 세계의 관점을 변화시킨다. 가령 바르톨루스 선장은 올랜도의 스커트를 보았을 때 당장 그녀를 위해 차양을 쳐주었고, 그녀에게 쇠고기 한 조각을 더 먹으라고 권했으며, 자기와 함께 대형 보트를 타고 뭍에 오르자고 요청했다. 그녀의 스커트가 흘러내리지 않고 반바지 모양으로 다리에 달라붙게 재단되었다면 그녀는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접을 받을 때 보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올랜도는 무릎을 굽혀 절했고, 그의 뜻에 순응했고, 그 선량한 남자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의 말쑥한 바지가 여자의 스커트였더라면, 그리고 그의 편직 코트가 여성의 공단 보디스였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옷이 우리를 입는 것이지, 우리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는 견해를 많은 사실이 뒷받침한다. 우리는 팔이나 가슴의 모양새에 맞게 옷을 만들지만, 옷은 우리의 마음과 두뇌, 혀를 그것에 맞게 만들어 낸다.
- 본문 193~194쪽
남자는 세상이 자신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고 자신의 기호에 맞게 형성된 것처럼 세상을 똑바로 직시한다. 그에 반해 여자는 미묘한 눈으로, 심지어 의혹을 품은 눈으로 세상을 곁눈질한다.
- 본문 194쪽
어서 오라, 자연스러운 욕망이여! 어서 오라, 행복이여! 성스러운 행복이여! 온갖 즐거움이여! 꽃과 포도주(비록 꽃은 시들고 포도주는 취하게 하지만). 일요일마다 런던을 벗어나게 해주는 반 크라운짜리 기차표. 어둑한 교회에서 부르는 죽음에 대한 찬송가. 타자기를 두드리고, 편지를 정리하고, 고리와 사슬을 주조하여 제국을 결속시키는 일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상점 여직원의 입술에 거칠게 그어진 붉은 활(큐피드가 아주 서툴게 붉은 잉크에 엄지손가락을 담갔다가 지나가면서 되는대로 징표를 남긴 듯이)도 환영한다. 어서 오라, 행복이여! 강둑 사이를 쏜살같이 날아다니는 물총새여. 남성 소설가들이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든, 모든 자연스러운 욕망의 충족이여!
- 본문 303쪽
만일 마음속에 (되는대로 어림잡아 말해서) 76개의 서로 다른 시간대가 동시에 재깍거리고 있다면, 인간의 영혼에는 이 시간대나 다른 시간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 우리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수없이 존재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2,052명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혼자 있을 때 〈올랜도?〉(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세상에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 부름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나는 이 특정한 자아가 싫증 나서 죽을 지경이니까. 나는 다른 자아를 원해. (……) 웨이터의 손에 쌓인 접시처럼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형성하는 그 자아들은 다른 곳에 애착과 공감을 느끼고 있고, 여러분이 그 자아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이 자아들 중 많은 것들은 이름이 없다) 자기들 나름의 소소한 기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아는 비가 내려야만 올 테고, 다른 자아는 녹색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만 올 것이며, 또 다른 자아는 존스 부인이 옆에 없어야 올 테고, 또 다른 자아는 포도주 한 잔을 주겠다고 약속해야 올 것이며, 이런 식으로 기타 등등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다.
- 본문 317~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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