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전복을 오가면서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외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모아지는 내적인 역사 발전에도 마디마다 혁명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으며 저항운동이 있었다. 때문에 숭고하게 희생된 선열들의 저항정신에 동화된 정홍순의 시는 저항적일 수밖에 없다. 저항이 있어서 서정도 존재의의가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역사적인 저항의 사건에 동화되어, 혹은 저항적인 실존 인물에 동화되어, 나아가 민중적 삶의 처연하면서도 강인한 저력을 상기하는 방언의 목소리로, 주로 호남의 그것에 동화되어 반향하고 있다. 저항적 주체와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세계와 융합한 서정으로도 그의 시는 유려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보한다. 근대가 열리면서 함께했던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세계사를 배경으로 하여 당위적인 궁극의 세계를 향한 저항의 목소리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이 있어서, 곧 저항의 목소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을 환기시킴으로써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 또한 당위적으로 부여받게 하는 까닭이다.
사월, 비 내리는 프라하
돌사과꽃 가만가만 밤 받쳐 들었다
가로등 헤치고
수런수런 피고 있는 마로니에
눈부시지 마라
조등처럼 밝히지도 마라
라일락 언덕에 강바람이 차다
말발굽 소리, 늦은 저녁 꽃 몰아
수작 걸어본들
쳐다보지도 않는 냉이꽃
민들레꽃
우리들 천박한 얼굴로 슬프겠느냐
조선의 역사에
변주할 수 없는 드보르작의 선율이
아리랑, 아리랑 울 수 있느냐
전쟁 없는 역사는 역사도 아니다
상처 받아보지 않은 모든 것은
봄이 가기 전 떠났다
칭칭 감아 피는 등꽃 프라하
우리에게도 봄이 있다
밤새 출렁이는 프라하
업어치기 한판 걸어 내일은
꽃으로 주저앉히고 말없이 빛나는
역사 앞으로 떠나야겠다
― 「프라하의 밤」 전문
‘프라하의 봄’이 비록 짧은 봄이었을지라도, 그 봄이 있어서 정홍순에게 프라하의 밤은 밤새 출렁이면서 ‘내일은 꽃으로 주저앉히고 말없이 빛나는 역사 앞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저항적 서정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돌사과꽃, 냉이꽃, 민들레꽃에 동화된 프라하의 봄, 곧 프라하의 서정이 칭칭 감아 피는 등꽃처럼 상처를 감아올리며 내일로의 역사를 진행하게 하는 저항의 저력이다. “전쟁 없는 역사는 역사도 아니다”는 정홍순의 언명처럼, 그리고 ‘전쟁은 역사 발전을 위해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필요악’이라는 칸트의 명제처럼 전쟁은 이율배반적인 역사 진행의 중심에 있다.
전쟁으로 혁명으로 반란으로, 곧 투쟁적 저항으로 역사가 어둠을 헤쳐 온 것처럼 “상처 받아보지 않은 모든 것은/봄이 가기 전에 떠났”듯이 “우리에게도 봄이 있”기 위해서는 전쟁이든 혁명이든 반란이든 겪어내야 한다는 정홍순이 프라하의 저항정신에 동화되어 그 봄을 예찬한다. 상처 받아보는 것을 필연으로 하여 산다는 것, 곧 상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태의 이율배반성이다.
충장로 도청 앞에서 인장 명인에게, 한 자에 만오천 원씩 주고 도장을 팠다 한 달 식권 값도 더 되는 삯, 선뜻 퍼주고 도장을 팠다 탄피만 한 상아, 한글로 새겨야 깨지지 않는다고, 떨면서 파던 명인의 손끝이, 광주를 더 슬프게 하였다 팔십칠년, 망월동에는 새 무덤이 늘어났다 비석에 그 이름 새겨지는 동안, 나는 인감도장을 팠다 혁명의 유월, 도장나무 까만 열매같이 가슴마다 검정 리본 달고, 독재 목 놓아 파내고 있는 동안, 나는 상아도장을 새겼다 붉은 피 묻혀 찍지도 못할 뼈다귀, 나도 낯선 내 이름을 팠다 코끼리처럼 죽은 유월의 아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팠다
― 「도장을 팠다」 전문
80년 광주의 봄도 프라하의 봄처럼 혁명의 봄이듯 프라하의 저항이 광주의 저항으로 치환된다. 비록 혁명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고 있을지라도 광주의 불꽃은 혁명이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파듯이 80년의 광주는 내일의 역사를 빛나게 할 붉은 꽃이다. 정홍순은 그 희생이, 도장밥의 붉은색처럼 그리고 붉은 꽃의 색깔보다 더 붉은, 영원히 빛날 희생이 있어서 내일의 역사는 별이 되리라고 광주의 정신을 승화시킨다.
― 진순애(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정홍순
충남 태안 남면에서 태어나 201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 『물소리를 밟다』 『갈대는 바다를 품고 산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가 있다. 〈화순문학상〉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카타콤 13/입만 슬프다 14/프라하의 밤 16/비텐베르크 광장에서 18/아우슈비츠 수용소 19/람세스의 콘돔 20/리비도 22/해를 캐다 24/목이 25/아도, 아도여 26/마라의 소녀 28/익다 30/중마동에서 동주를 생각하다 31/LA 플라워 32/식물공장 34
제2부
솔포기 같은 연애 37/물의 경계 38/삼합의 겨울 40/맷돌 두부 42/장마 43/첫눈에 그리다 44/당아 46/정이품송 48/나로도 봄비 49/아이스크림 날개도 팝니다 50/부부 52/쪽보다 더 푸를 수 있는가 53/나는 악마의 선에서 살았다 54/아귀탕 56/청춘 58
제3부
향단이 생각 61/땅에 쓴 글씨 62/봄비 64/청려장 66/한때는 비적이었다 67/어깃장 68/고명 70/명자에게 72/콧구멍에 부는 바람 73/봉문이발소 74/모래가 운다 76/입동 서리 78/새우비 79/햇빛 오브제 80/도장을 팠다 82
제4부
물에 비친 산은 젖지 않는다 85/전라도 오소리 86/운조루 가빈터에서 88/돌산 갓 90/낙안온천 가는 날 92/어은골 이야기 94/근황 96/다시 삭금리에서 97/금오도 비렁길 100/선진리 벚꽃 노래 102/적벽강 103/벽파진에 서다 104/운암산에 내리는 비 106/남생이 108
해설 저항의 서정/진순애(문학평론가)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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