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좌파란 용어의 기원
아빠 :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리키는 좌파, 우파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알고 있니?
200년 전, 그러니까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을 대표하는 하원의원들로 구성된 제헌국민의회가 소집됐어. 당시 국민의회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는 편과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지지하면서 어느 정도의 변혁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왕정을 유지해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편으로 나뉘었지.
1789년 8월 28일 왕권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법안에 대한 투표가 있었단다. 국민의회의 결정에 왕이 반대할 수 있는 거부권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대한 투표였어. 표결 순간, 왕정주의자는 의장이 있는 연단의 오른쪽으로 모였고 왕정 반대자는 왼쪽으로 모였어. 당시는 일어서거나 앉는 것으로 표결을 했기 때문에 같은 표끼리 모이는 게 수를 세는 데 더 편리했을뿐더러 그때도 정치인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같은 편 사이에 있는 게 더 안전했지.
이날 이후로, 19세기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따르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지하면서 확고히 하려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회의 왼편에, 사회질서?전통?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단다.
이게 좌파, 우파라는 말의 기원이야.
그러니까, 서로 대립적인 좌와 우의 개념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져서 전 세계로 퍼진 거란다.
좌파란 무엇인가(1차적인 정의)
아빠 : 모든 나라에서 좌파와 우파는 추구하는 사회 변화의 정도와 성격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지.
좌와 우라는 표현의 역사적 기원을 바탕으로 좌파와 우파에 대한 1차적인 정의를 정리하면 좌파는 변혁과 변화를 추구하고, 우파는 안정?보수?최소한의 변화를 지지한단다. 표면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수용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지.
클레망스 : 우파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잖아요.
아빠 :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서 19세기와 20세기에는 내가 방금 설명한 좌파와 우파의 1차적인 정의가 유효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아. 지난 200년 동안 좌파와 우파는 많이 변했단다. 오늘날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우리가 사는 사회도 급변하고 있어. 안정을 추구하는 당이라고 해서 더 이상 부동불변을 원하지 않아. 오늘날에는 어떤 정당이든 ‘변혁’을 추구한단다. 좌우의 대립은 더 이상 안정?전통 대 변혁?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개념의 대립이야. 변혁? 좋아!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변혁하자는 거지? 이것이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질문이란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아빠 : 좌파는 무엇보다도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비롯해서 모든 사회는 구성원이 다양하고, 불평등?부조리?폭력이 존재하는 정의롭지 못한 곳이야.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 시각이 존재할 수 있어.
먼저, “언제는 안 그랬어? 어느 시대나 부자와 가난뱅이,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강자와 약자, 용기 있는 사람과 비겁한 사람, 영리한 사람과 바보가 있었어. 이게 자연의 이치고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자선을 베풀면 돼”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있지. 신이 그런 세상을 원한다거나 아니면 복은 타고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고.
클레망스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아빠 : 그렇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런 태도만 있는 건 아니야.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어.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도 운명도 아니다. 그러니 더 정의롭고, 더 우애롭고, 더 인간적인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 말이야.
방금 말한 것이 좌파의 태도이고 그전에 설명한 것이 우파의 태도야. 여기서 1차적인 정의를 더 명확히 해주는 새로운 정의를 도출해낼 수 있단다. 좌파는 지금과 같은 상태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평등?정의?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우파는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일 일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현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각
아빠 :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또 다른 기준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이란다.
좌파는 인간을 낙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단다. 학교에서 장자크 루소 배웠지? 루소의 사상에 좌파가 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념이 잘 표현되어 있단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고 창조물 가운데 가장 너그러운 동물이라는구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열망하는데, 사회가 모든 악의 근원인 사유재산과 불평등을 만들어서 인간을 망치고 악인으로 변하게 한다는 거지.
정의롭고, 평등하고, 갈등이 없도록 조직된 사회는 인간이 선하고 관대한 본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탐욕, 권력욕, 지배욕에 종말을 고하게 한다는 거야.
반대로 우파는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대부분의 인간은 본래 악하고 폭력적이라는 거야. 쾌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다른 인간을 고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거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한 말인데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한마디로 잘 표현하고 있어.
이성, 의지, 진보
아빠 : 좌파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믿어. 세상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무지와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단다. 그런데 18∼19세기에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과소평가됐어. 그래도 좌파는 인간의 정신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의지는 모든 걸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진보는 좌파의 또 다른 믿음이야. 내일은 오늘보다 좋고 우리는 부모님 세대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믿음.
클레망스 : 그러면 우파는 이성, 의지, 진보를 믿지 않나요?
아빠 : 우파는 좀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 인간의 이성이 가진 약점을 더 강조하고 이성이라는 것이 자만심만큼이나 깨지기 쉽다고 주장하지. 대부분의 우파에게 인간은 비이성적인 존재고 인간의 의지라는 것도 지성보다는 격정에 휩싸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우파가 1789년 프랑스혁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혁명을 통해 전통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겠다고 교만을 부렸다는 점이야. 우파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고 자연의 이치를 바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이성과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무례하고 부적절하고 우스꽝스럽고 목적의식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고 있다고 비판하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아빠 : 좌파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야.
클레망스 : 그런데 왜 늘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고 말하는 거죠? 같은 말 아녜요? 시민은 인간과 다른 권리를 갖는다는 뜻인가요?
아빠 : 그런 건 아니고,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구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다. 인권은 인간의 안전, 존엄성, 자유를 보장하는 민법상의 모든 권리를 말하지. 인간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원하는 종교를 갖고, 재산을 보호받고, 아무런 이유 없이 체포나 구금되지 않고, 고문 등 잔혹행위를 당하지 않고, 심문을 받을 경우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져. 이 권리는 정부와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거야. 인권 존중이 당연해 보이지만 유엔 184개 회원국 가운데 50여 개국만이 보장받고 그것도 완벽하지는 못한 실정이란다.
시민권은 인권과 다르단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공동체와 관련한 결정에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에 관한 것이야. 우리가 힘이라고 일컫는 권리들이지. 선거권, 집회결사의 자유, 청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이에 속한단다. 인권과 시민권은 분명히 서로 다른 권리이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야. 예를 들어, 한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진다고 해도 인권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나라는 진정한 민주국가가 아니야. 인권은 민주적인 사회일수록 더 잘 존중된단다.
실제적 권리와 형식적 권리
아빠 :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선언하고 헌법에 명시하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좌파는 일찍이 깨달았어.
인권과 시민권이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 될 수 있으려면 일해서 번 돈으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사는 게 가능해야 해. 장기 실업자나 집 없는 사람이 없고, 불안정한 임시직이 사라져야 하지.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고 직장에서 사고나 해고를 당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지원받아야 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단다.
모든 사람에게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제공해서 거센 바람에도 꼿꼿이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고, 필요할 경우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 또 정보를 얻고 자기계발을 하고 자신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보장해야 해.
하지만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권리가 실제로 행사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극빈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단다.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
클레망스 : 그러면 인권과 시민권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기 위해 좌파가 한 일은 뭐예요?
아빠 : 지금까지 말한 민권과 정치적 권리에 더해서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의 보장을 위해 노력했지.
보통?무상?의무 교육이 사회적 권리의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모든 어린이가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배워서 양식 있는 시민과 유능한 직업인이 되도록 교육받을 권리를 말하는 거야. 좌파와 노동조합이 얻어낸 다른 사회적 권리로는 퇴직연금, 건강권, 사회보장, 최소임금, 최대 노동시간 제한, 실업수당, 주거 이전의 권리, 휴식을 취할 권리, 유급휴가, 문화를 향유할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사측과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파업할 권리 등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단다.
평등과 자유
클레망스 : 경제 선생님께서 좌파는 자유보다는 평등을, 우파는 평등보다는 자유를 선호한다고 했어요. 그게 좌파와 우파의 차이점이라고요.
아빠 : 민주주의 좌파는 평등을 더 선호하지 않아. 평등 없는 자유, 자유 없는 평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브라질처럼 양극화가 심각한 나라에서 자유는 부자들만의 특권이 되어버렸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최소한의 평등이 보장될 때에만 모든 사람을 위한 재산이 될 수 있단다.
클레망스 : 네 선생님의 얘기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권위주의 좌파는 자유를 평등 밑에 두었고 자유주의 우파는 평등을 자유 밑에 두었어. 특히 기업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평등보다 우선했지. 하지만 민주주의 좌파는 자유와 평등을 같은 속도로 발전시키려 노력한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 좌파와 우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여기서 엿볼 수 있어. 좌파의 기본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 인권, 민주주의라는 공화국의 가치야. 여기에 100년 전에 정교분리가, 20년 전에 환경의 가치가 더해졌어. 그렇지만 좌파는 무엇보다도 평등의 이념에 민감하단다. 좌파의 출발 자체가 노동자계급이었고, ‘없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평등은 좌파의 근본이념이고 다른 모든 이념에 실제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단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
아빠 : 평등에도 여러 종류가 있단다. 좌파는 사람이 서로 다르고 여러 면에서 같지 않다는 걸 부정하지 않아. 평등과 획일을 혼동해서는 안 돼. “모든 사람이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거든. 능력, 재능, 일의 성격에 따라 생기는 불평등은 정당한 거지.
클레망스 :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한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불평등이 있다면, 왜 그렇게 평등에 집착하는 거죠?
아빠 : 왜냐하면 좌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평등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 사회정의, 연대, 민주주의가 실제로 얼마나 잘 구현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평등을 얘기할 때 무엇이 평등한지 늘 정확히 말해야 해. 누구와 누가 평등한가? 어떤 조건에서 평등한가? 지적 능력의 평등? 부의 평등? 외모의 평등? 막연한 평등을 얘기해서는 안 돼. 좌파는 존엄성?권리?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물론 불평등한 조건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그럼, 한번 요약을 해보겠다!
좌파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단다. 세상의 불의, 불합리, 폭력, 야만성에 굴복하지 않아. 사회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순리가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모두 힘을 합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자유, 평등, 연대, 이성, 인권, 민주주의, 사회정의, 정교분리, 환경보호라는 가치가 살아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려는 것이 좌파야.
좌파의 가치를 살리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좌파가 정한 위대한 세 가지 목표에 잘 표현되어 있단다. 바로 이 목표들이 오늘날의 좌파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해.
사회민주주의
아빠 : 첫 번째 목표는 1848년 혁명 때 좌파의 수장들이 천명한 것처럼 진정한 민주주의,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주의공화국’을 실현하는 거야.
클레망스 :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거죠?
아빠 : 먼저, 실업을 없애고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거지. 적은 임금에 임시직 ‘허드렛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거야. 그리고 사회보장제도를 개선해서 모든 사람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거지.
빈곤층의 수가 600만 명이나 되고, 실업자는 200만 명에 이르고 또 그만큼의 사람이 겨우 몇 달 동안만 일하는 불안정한 직장을 전전하는 민주주의는 병든 민주주의야.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지역, 국가 공동체의 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돼야 해.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다
아빠 : 좌파의 두 번째 목표는 우리 공동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거야. 특히 경제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예측하고 대처하는 거지. 경제는 혼란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란다. 그런데 위기는 점점 더 자주 발생하고 지난 10년 동안 다섯 번이나 되는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어.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같은 국제 금융 당국이 비행기를 타고 급한 불을 끄러 다니지만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단다. 세계경제는 각국이 아무런 통제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때 어떤 혼란이 초래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되는지 좋은 예를 제공해주었어.
이네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아빠 : 많은 걸 할 수 있지. 1997년 9월 프랑스 정부는 유럽연합 회원국에게 16개 개혁안을 제안했어. 16개 개혁안이 모두 국제 금융과 경제에 각국 정부의 감독과 개입 권한을 다시 강화하는 것이란다.
이제 유럽은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가진 강력한 연합체가 되었고, 산업과 무역 분야에서 강국의 위치에 있으므로 세계경제에서 그만큼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지. 유럽연합처럼 다른 지역에도 지역공동시장이 구성되었단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라틴아메리카에는 메르코수르(MERCOSUR), 아시아에는 아세안(ASEAN)이 만들어졌어. 대륙별로 경제공동시장이 조직되면 국제 협력이 용이해져서 더 안정되고 강력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단다.
인간다운 사회, 문화적인 인간
아빠 : 세 번째 목표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경제와 기술 발전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이 모든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어.
여기서도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단다.
좌파에게 좋은 사회란 끊임없이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각 구성원의 발전을 목표로 삼는 사회야. 카를 마르크스가 좋은 사회를 정확하게 기술한 바 있어.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이다.” 좌파는 과학?기술?경제가 인간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과학?기술?경제의 발전은 사회정의?민주주의?여가?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클레망스 :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빠 : 미국은 경제의 역동성과 신기술 개발 분야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이야. 하지만 불평등과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나라이기도 해. 최근 OECD의 발표에 따르면, 기술 진보에도 미국의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는구나.
사회는 계속 부유해지는데 구성원의 일부가 계속 가난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말이 안 돼! 기술 발전과 사회 진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거지. 기술이 발전한다고 사회가 저절로 진보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한 거지.
기술 발전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개인의 발전과 목표를 성취하게끔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좌파의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노동시간 단축이야.
여가가 만들어낸 문명
아빠 :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건 실업률을 줄이기 위한 많은 정책 중 하나야. 하지만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는 ‘사회정책’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단다.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는 성경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전체를 노동에 바치고 있단다.
오늘날에는 구속시간보다 여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었어. 여가는 각자가 선택한 활동을 하는 시간이고, 구속시간은 봉급을 받는 대가로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고된 일을 하는 시간이야. 좌파는 사람들이 더 많은 여가를 가질 수 있는 ‘여가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단다.
노동시간을 줄여서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쓰도록 하자는 거야. 문화생활?여가 활동?예술 활동을 한다든지, 강좌를 듣거나 학업을 계속하고, 조합이나 정치단체에도 참여하고.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수도 있고 말이야.
클레망스 : 너무 지식인이나 특권층의 생각 같지 않아요? 라디오에서 은퇴한 부부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두 분 다 일할 때는 저녁에 함께 시간 보내는 게 문제가 안 되었는데 은퇴하고 나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서로 얼굴만 보고 있어야 하니 죽을 맛이라는 거죠. 돈이 없으면 여가를 즐길 수가 없어요.
아빠 :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봉급 인하나 동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리고 제품들의 가격이 내리고, 평생교육?원거리 교육?문화예술 공연 등 공공 프로그램이나 민간 합작 프로그램이 활성화해야 하고.
대립에서 대립으로
이네스우리 사회 선생님께서 좌파와 우파 개념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대요. 좌파와 우파가 별 차이가 없다고요?
아빠 : 그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봐. 15년 전부터 개혁좌파와 자유주의 우파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들 했지. 당의 정강에만 적혀 있을 뿐 좌우의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도 좌파와 우파는 의회에서 대부분의 개혁에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거의 언제나 서로 다른 표를 던지고 있지.
좌파와 우파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대립의 대상이 바뀌고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다는 거지.
▣ 작가 소개
저자 : 앙리 베베르 Henri Weber
프랑스의 사회당 소속 정치가. 1968년 5월혁명에 참여했으며, 사회당에 입당하기 전에는 트로츠키주의자로 혁명적공산주의청년회(JCR)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을 이끌었다. 유럽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앙리 베베르는 인류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위해 좌파가 어떻게 현실에서 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지 두 딸 클레망스와 이네스에게 들려주고 있다.
역자 : 임명주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상무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SOPEXA) 대표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 『점령하라』 『경영 심리학』이 있다.
▣ 주요 목차
시작하면서
1. 기초 작업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세 개의 좌파와 세 개의 우파
특권과 빈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각
2. 가치관
이성, 의지, 진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실제적 권리와 형식적 권리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
평등과 자유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
존엄성, 권리, 기회의 평등
자연보호와 생활환경 보호
3. 오늘날 좌파가 된다는 것
사회민주주의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다
인간다운 사회, 문화적인 인간
여가가 만들어낸 문명
대립에서 대립으로
좌파란 용어의 기원
아빠 :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리키는 좌파, 우파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알고 있니?
200년 전, 그러니까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을 대표하는 하원의원들로 구성된 제헌국민의회가 소집됐어. 당시 국민의회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는 편과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지지하면서 어느 정도의 변혁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왕정을 유지해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편으로 나뉘었지.
1789년 8월 28일 왕권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법안에 대한 투표가 있었단다. 국민의회의 결정에 왕이 반대할 수 있는 거부권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대한 투표였어. 표결 순간, 왕정주의자는 의장이 있는 연단의 오른쪽으로 모였고 왕정 반대자는 왼쪽으로 모였어. 당시는 일어서거나 앉는 것으로 표결을 했기 때문에 같은 표끼리 모이는 게 수를 세는 데 더 편리했을뿐더러 그때도 정치인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같은 편 사이에 있는 게 더 안전했지.
이날 이후로, 19세기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따르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지하면서 확고히 하려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회의 왼편에, 사회질서?전통?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단다.
이게 좌파, 우파라는 말의 기원이야.
그러니까, 서로 대립적인 좌와 우의 개념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져서 전 세계로 퍼진 거란다.
좌파란 무엇인가(1차적인 정의)
아빠 : 모든 나라에서 좌파와 우파는 추구하는 사회 변화의 정도와 성격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지.
좌와 우라는 표현의 역사적 기원을 바탕으로 좌파와 우파에 대한 1차적인 정의를 정리하면 좌파는 변혁과 변화를 추구하고, 우파는 안정?보수?최소한의 변화를 지지한단다. 표면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수용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지.
클레망스 : 우파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잖아요.
아빠 :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서 19세기와 20세기에는 내가 방금 설명한 좌파와 우파의 1차적인 정의가 유효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아. 지난 200년 동안 좌파와 우파는 많이 변했단다. 오늘날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우리가 사는 사회도 급변하고 있어. 안정을 추구하는 당이라고 해서 더 이상 부동불변을 원하지 않아. 오늘날에는 어떤 정당이든 ‘변혁’을 추구한단다. 좌우의 대립은 더 이상 안정?전통 대 변혁?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개념의 대립이야. 변혁? 좋아!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변혁하자는 거지? 이것이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질문이란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아빠 : 좌파는 무엇보다도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비롯해서 모든 사회는 구성원이 다양하고, 불평등?부조리?폭력이 존재하는 정의롭지 못한 곳이야.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 시각이 존재할 수 있어.
먼저, “언제는 안 그랬어? 어느 시대나 부자와 가난뱅이,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강자와 약자, 용기 있는 사람과 비겁한 사람, 영리한 사람과 바보가 있었어. 이게 자연의 이치고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자선을 베풀면 돼”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있지. 신이 그런 세상을 원한다거나 아니면 복은 타고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고.
클레망스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아빠 : 그렇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런 태도만 있는 건 아니야.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어.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도 운명도 아니다. 그러니 더 정의롭고, 더 우애롭고, 더 인간적인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 말이야.
방금 말한 것이 좌파의 태도이고 그전에 설명한 것이 우파의 태도야. 여기서 1차적인 정의를 더 명확히 해주는 새로운 정의를 도출해낼 수 있단다. 좌파는 지금과 같은 상태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평등?정의?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우파는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일 일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현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각
아빠 :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또 다른 기준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이란다.
좌파는 인간을 낙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단다. 학교에서 장자크 루소 배웠지? 루소의 사상에 좌파가 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념이 잘 표현되어 있단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고 창조물 가운데 가장 너그러운 동물이라는구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열망하는데, 사회가 모든 악의 근원인 사유재산과 불평등을 만들어서 인간을 망치고 악인으로 변하게 한다는 거지.
정의롭고, 평등하고, 갈등이 없도록 조직된 사회는 인간이 선하고 관대한 본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탐욕, 권력욕, 지배욕에 종말을 고하게 한다는 거야.
반대로 우파는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대부분의 인간은 본래 악하고 폭력적이라는 거야. 쾌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다른 인간을 고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거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한 말인데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한마디로 잘 표현하고 있어.
이성, 의지, 진보
아빠 : 좌파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믿어. 세상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무지와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단다. 그런데 18∼19세기에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과소평가됐어. 그래도 좌파는 인간의 정신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의지는 모든 걸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진보는 좌파의 또 다른 믿음이야. 내일은 오늘보다 좋고 우리는 부모님 세대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믿음.
클레망스 : 그러면 우파는 이성, 의지, 진보를 믿지 않나요?
아빠 : 우파는 좀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 인간의 이성이 가진 약점을 더 강조하고 이성이라는 것이 자만심만큼이나 깨지기 쉽다고 주장하지. 대부분의 우파에게 인간은 비이성적인 존재고 인간의 의지라는 것도 지성보다는 격정에 휩싸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우파가 1789년 프랑스혁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혁명을 통해 전통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겠다고 교만을 부렸다는 점이야. 우파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고 자연의 이치를 바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이성과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무례하고 부적절하고 우스꽝스럽고 목적의식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고 있다고 비판하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아빠 : 좌파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야.
클레망스 : 그런데 왜 늘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고 말하는 거죠? 같은 말 아녜요? 시민은 인간과 다른 권리를 갖는다는 뜻인가요?
아빠 : 그런 건 아니고,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구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다. 인권은 인간의 안전, 존엄성, 자유를 보장하는 민법상의 모든 권리를 말하지. 인간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원하는 종교를 갖고, 재산을 보호받고, 아무런 이유 없이 체포나 구금되지 않고, 고문 등 잔혹행위를 당하지 않고, 심문을 받을 경우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져. 이 권리는 정부와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거야. 인권 존중이 당연해 보이지만 유엔 184개 회원국 가운데 50여 개국만이 보장받고 그것도 완벽하지는 못한 실정이란다.
시민권은 인권과 다르단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공동체와 관련한 결정에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에 관한 것이야. 우리가 힘이라고 일컫는 권리들이지. 선거권, 집회결사의 자유, 청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이에 속한단다. 인권과 시민권은 분명히 서로 다른 권리이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야. 예를 들어, 한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진다고 해도 인권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나라는 진정한 민주국가가 아니야. 인권은 민주적인 사회일수록 더 잘 존중된단다.
실제적 권리와 형식적 권리
아빠 :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선언하고 헌법에 명시하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좌파는 일찍이 깨달았어.
인권과 시민권이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 될 수 있으려면 일해서 번 돈으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사는 게 가능해야 해. 장기 실업자나 집 없는 사람이 없고, 불안정한 임시직이 사라져야 하지.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고 직장에서 사고나 해고를 당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지원받아야 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단다.
모든 사람에게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제공해서 거센 바람에도 꼿꼿이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고, 필요할 경우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 또 정보를 얻고 자기계발을 하고 자신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보장해야 해.
하지만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권리가 실제로 행사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극빈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단다.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
클레망스 : 그러면 인권과 시민권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기 위해 좌파가 한 일은 뭐예요?
아빠 : 지금까지 말한 민권과 정치적 권리에 더해서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의 보장을 위해 노력했지.
보통?무상?의무 교육이 사회적 권리의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모든 어린이가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배워서 양식 있는 시민과 유능한 직업인이 되도록 교육받을 권리를 말하는 거야. 좌파와 노동조합이 얻어낸 다른 사회적 권리로는 퇴직연금, 건강권, 사회보장, 최소임금, 최대 노동시간 제한, 실업수당, 주거 이전의 권리, 휴식을 취할 권리, 유급휴가, 문화를 향유할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사측과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파업할 권리 등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단다.
평등과 자유
클레망스 : 경제 선생님께서 좌파는 자유보다는 평등을, 우파는 평등보다는 자유를 선호한다고 했어요. 그게 좌파와 우파의 차이점이라고요.
아빠 : 민주주의 좌파는 평등을 더 선호하지 않아. 평등 없는 자유, 자유 없는 평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브라질처럼 양극화가 심각한 나라에서 자유는 부자들만의 특권이 되어버렸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최소한의 평등이 보장될 때에만 모든 사람을 위한 재산이 될 수 있단다.
클레망스 : 네 선생님의 얘기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권위주의 좌파는 자유를 평등 밑에 두었고 자유주의 우파는 평등을 자유 밑에 두었어. 특히 기업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평등보다 우선했지. 하지만 민주주의 좌파는 자유와 평등을 같은 속도로 발전시키려 노력한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 좌파와 우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여기서 엿볼 수 있어. 좌파의 기본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 인권, 민주주의라는 공화국의 가치야. 여기에 100년 전에 정교분리가, 20년 전에 환경의 가치가 더해졌어. 그렇지만 좌파는 무엇보다도 평등의 이념에 민감하단다. 좌파의 출발 자체가 노동자계급이었고, ‘없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평등은 좌파의 근본이념이고 다른 모든 이념에 실제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단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
아빠 : 평등에도 여러 종류가 있단다. 좌파는 사람이 서로 다르고 여러 면에서 같지 않다는 걸 부정하지 않아. 평등과 획일을 혼동해서는 안 돼. “모든 사람이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거든. 능력, 재능, 일의 성격에 따라 생기는 불평등은 정당한 거지.
클레망스 :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한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불평등이 있다면, 왜 그렇게 평등에 집착하는 거죠?
아빠 : 왜냐하면 좌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평등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 사회정의, 연대, 민주주의가 실제로 얼마나 잘 구현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평등을 얘기할 때 무엇이 평등한지 늘 정확히 말해야 해. 누구와 누가 평등한가? 어떤 조건에서 평등한가? 지적 능력의 평등? 부의 평등? 외모의 평등? 막연한 평등을 얘기해서는 안 돼. 좌파는 존엄성?권리?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물론 불평등한 조건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그럼, 한번 요약을 해보겠다!
좌파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단다. 세상의 불의, 불합리, 폭력, 야만성에 굴복하지 않아. 사회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순리가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모두 힘을 합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자유, 평등, 연대, 이성, 인권, 민주주의, 사회정의, 정교분리, 환경보호라는 가치가 살아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려는 것이 좌파야.
좌파의 가치를 살리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좌파가 정한 위대한 세 가지 목표에 잘 표현되어 있단다. 바로 이 목표들이 오늘날의 좌파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해.
사회민주주의
아빠 : 첫 번째 목표는 1848년 혁명 때 좌파의 수장들이 천명한 것처럼 진정한 민주주의,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주의공화국’을 실현하는 거야.
클레망스 :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거죠?
아빠 : 먼저, 실업을 없애고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거지. 적은 임금에 임시직 ‘허드렛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거야. 그리고 사회보장제도를 개선해서 모든 사람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거지.
빈곤층의 수가 600만 명이나 되고, 실업자는 200만 명에 이르고 또 그만큼의 사람이 겨우 몇 달 동안만 일하는 불안정한 직장을 전전하는 민주주의는 병든 민주주의야.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지역, 국가 공동체의 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돼야 해.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다
아빠 : 좌파의 두 번째 목표는 우리 공동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거야. 특히 경제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예측하고 대처하는 거지. 경제는 혼란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란다. 그런데 위기는 점점 더 자주 발생하고 지난 10년 동안 다섯 번이나 되는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어.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같은 국제 금융 당국이 비행기를 타고 급한 불을 끄러 다니지만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단다. 세계경제는 각국이 아무런 통제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때 어떤 혼란이 초래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되는지 좋은 예를 제공해주었어.
이네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아빠 : 많은 걸 할 수 있지. 1997년 9월 프랑스 정부는 유럽연합 회원국에게 16개 개혁안을 제안했어. 16개 개혁안이 모두 국제 금융과 경제에 각국 정부의 감독과 개입 권한을 다시 강화하는 것이란다.
이제 유럽은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가진 강력한 연합체가 되었고, 산업과 무역 분야에서 강국의 위치에 있으므로 세계경제에서 그만큼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지. 유럽연합처럼 다른 지역에도 지역공동시장이 구성되었단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라틴아메리카에는 메르코수르(MERCOSUR), 아시아에는 아세안(ASEAN)이 만들어졌어. 대륙별로 경제공동시장이 조직되면 국제 협력이 용이해져서 더 안정되고 강력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단다.
인간다운 사회, 문화적인 인간
아빠 : 세 번째 목표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경제와 기술 발전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이 모든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어.
여기서도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단다.
좌파에게 좋은 사회란 끊임없이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각 구성원의 발전을 목표로 삼는 사회야. 카를 마르크스가 좋은 사회를 정확하게 기술한 바 있어.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이다.” 좌파는 과학?기술?경제가 인간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과학?기술?경제의 발전은 사회정의?민주주의?여가?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클레망스 :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빠 : 미국은 경제의 역동성과 신기술 개발 분야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이야. 하지만 불평등과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나라이기도 해. 최근 OECD의 발표에 따르면, 기술 진보에도 미국의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는구나.
사회는 계속 부유해지는데 구성원의 일부가 계속 가난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말이 안 돼! 기술 발전과 사회 진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거지. 기술이 발전한다고 사회가 저절로 진보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한 거지.
기술 발전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개인의 발전과 목표를 성취하게끔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좌파의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노동시간 단축이야.
여가가 만들어낸 문명
아빠 :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건 실업률을 줄이기 위한 많은 정책 중 하나야. 하지만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는 ‘사회정책’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단다.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는 성경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전체를 노동에 바치고 있단다.
오늘날에는 구속시간보다 여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었어. 여가는 각자가 선택한 활동을 하는 시간이고, 구속시간은 봉급을 받는 대가로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고된 일을 하는 시간이야. 좌파는 사람들이 더 많은 여가를 가질 수 있는 ‘여가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단다.
노동시간을 줄여서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쓰도록 하자는 거야. 문화생활?여가 활동?예술 활동을 한다든지, 강좌를 듣거나 학업을 계속하고, 조합이나 정치단체에도 참여하고.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수도 있고 말이야.
클레망스 : 너무 지식인이나 특권층의 생각 같지 않아요? 라디오에서 은퇴한 부부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두 분 다 일할 때는 저녁에 함께 시간 보내는 게 문제가 안 되었는데 은퇴하고 나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서로 얼굴만 보고 있어야 하니 죽을 맛이라는 거죠. 돈이 없으면 여가를 즐길 수가 없어요.
아빠 :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봉급 인하나 동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리고 제품들의 가격이 내리고, 평생교육?원거리 교육?문화예술 공연 등 공공 프로그램이나 민간 합작 프로그램이 활성화해야 하고.
대립에서 대립으로
이네스우리 사회 선생님께서 좌파와 우파 개념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대요. 좌파와 우파가 별 차이가 없다고요?
아빠 : 그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봐. 15년 전부터 개혁좌파와 자유주의 우파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들 했지. 당의 정강에만 적혀 있을 뿐 좌우의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도 좌파와 우파는 의회에서 대부분의 개혁에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거의 언제나 서로 다른 표를 던지고 있지.
좌파와 우파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대립의 대상이 바뀌고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다는 거지.
▣ 작가 소개
저자 : 앙리 베베르 Henri Weber
프랑스의 사회당 소속 정치가. 1968년 5월혁명에 참여했으며, 사회당에 입당하기 전에는 트로츠키주의자로 혁명적공산주의청년회(JCR)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을 이끌었다. 유럽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앙리 베베르는 인류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위해 좌파가 어떻게 현실에서 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지 두 딸 클레망스와 이네스에게 들려주고 있다.
역자 : 임명주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상무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SOPEXA) 대표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 『점령하라』 『경영 심리학』이 있다.
▣ 주요 목차
시작하면서
1. 기초 작업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세 개의 좌파와 세 개의 우파
특권과 빈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각
2. 가치관
이성, 의지, 진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실제적 권리와 형식적 권리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
평등과 자유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
존엄성, 권리, 기회의 평등
자연보호와 생활환경 보호
3. 오늘날 좌파가 된다는 것
사회민주주의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다
인간다운 사회, 문화적인 인간
여가가 만들어낸 문명
대립에서 대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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