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소중한 것을 감춘 주인공들,
비밀 상자 같은 일곱 편의 소설
최상희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 『닷다의 목격』에 실린 단편들은 사뭇 평범해 보이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인물과 상황을 그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닷다와 그런 닷다에게만 보이는 존재들(「닷다의 목격」), 도시의 평화를 빌며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15~17세 소녀들을 대상으로 매년 제비뽑기를 하는 도시(「제물」), 양성으로 살아가는 게 정상인 사회에서 여성성만 가진 채 태어난 이안과 그녀를 차별과 혐오로부터 지키고 싶은 엄마(혹은 아빠) 조의 이야기(「사과의 반쪽」), 어느 날 갑자기 명치가 따끔, 하는 느낌과 함께 식물로 변해버리는 결석생들(「그래도 될까」), 화성 이주민들과의 야구 경기를 위해 지구를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친선팀의 이야기(「화성의 플레이볼」) 등 SF라는 장르적 공통점만을 공유한, 다양하고 풍성한 소재로 지은 일곱 편의 단편이 모여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한 소설집이 되었다.
닷다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
닷다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본다. 오래된 나무 도마에 깃든 백발 할머니라든지, 영화관에서 공포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하이에나 떼라든지……. 학생이 된 닷다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척하는 데 도가 텄다. 무언가 보인다고 말하면 엄마가 슬퍼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닷다는 교복까지 차려입고 교실에 떡하니 앉아 있는 너구리를 보게 된다. 보송보송 털 달린 꼬리하며 눈 주변 거무튀튀한 무늬하며…. 분명 너구리가 틀림없었다. 너구리가, 교복까지 입고, 남의 교실에, 왜? 의문이 들었지만 닷다는 역시 너구리를 못 본 척하기로 한다. 어차피 다른 애들 눈에는 안 보일 테니까. 나만 못 본 척하면 만사오케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교내 여자화장실에서 몰카 사건이 발생하고 몇몇 학생들이 몸싸움을 벌인다. 뒤늦게 사건 장소에 간 닷다는 사건의 일부만 보게 되고, 한쪽 구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너구리에게 사건의 전말에 대해 듣는다. 이후 폭행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사건이 벌어지고, 가해자가 된 피해자 양다솔이 닷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닷다는 ‘못 본’ 걸 봤다고 할 필요는 없으므로, 외면한다.
피해자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뒤 교실 한 구석에 또 다른 녀석이 들어왔다(물론 닷다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녀석은 아주 시커멓고 흉측하게 생겼는데,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 몰라도 아주 징그럽고 빠르게 커진다. 교실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그 녀석은 점점 커져서 교실을 넘어 복도까지 비어져 나간다. 몰카 사건 이후,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모두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닷다는 실체 없는 괴물이 교실 전체를 압사시키기 전에 결심한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걸 말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지만, 이번만큼은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양다솔, 나는 내가 본 것을 너에게 얘기하고 싶어. 너에게는. 그리고 어쩌면 다른 아이들에게도 언젠가는. _34쪽 「닷다의 목격」
낯설게 하지만 낯설지 않은
일곱 편의 작품들 모두 낯선 배경에 독특한 인물들을 묘사해 사뭇 SF소설이나 판타지소설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차별, 혐오, 분노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작품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닷다와 그의 눈에만 보이는 너구리 바닐라빈의 이야기는 일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서늘하다. 몰카 사건이 벌어지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기고, 그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뒤바뀌는 등 마치 어른들 사회의 축소판인 것 같은 학교 안의 이야기. 작가는 닷다의 시선으로 사건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때로는 너구리의 입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비꼰다.
그런가 하면 한 몸에 양성을 갖고 태어나는 게 ‘정상’인 사회에서 여성성만 가진 채 살아가는 이안과 그런 그녀를 세상의 차별과 혐오로부터 지키고 싶은 엄마(혹은 아빠) 조의 이야기(「사과의 반쪽」)는, 소수자들을 대하는 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갈등 역시 해결되지 않지만 세상을 향해 변명하는 대신 이안과 자신의 내면이 먼저 단단해질 것을 다짐한다. 지금도 해소되지 않은 갈등에 신음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조언이 아닐까.
「화성의 플레이볼」은 친선팀으로 뽑혀 화성으로 떠났던 야구팀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어느 미래, 화성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화성 시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된 ‘화성 야구’는, 지구의 야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이내 지구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양 행성 간 친선경기를 해온 지 10여 년이 흐르고, 처음으로 여성 야구단이 친선팀으로 선발되어 화성에 방문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지구 친선팀은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사마저 불분명해진다. 최상희 작가는 이 작품을 ‘홍콩 시민들의 범죄자 인도법(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쓴 소설이다.’라고 밝혔다(「작가 후기」).
소설이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바로 떠오르게 한다면 문학적 메타포로는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홍콩 시민들의 시위를 떠올려 주기를 바랐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부디 포기하지 않길, 그리고 모두 무사하길 빈다. _187쪽 작가 후기
이렇듯 소설집 『닷다의 목격』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설정이지만 혐오, 차별, 고정관념, 부당함 등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을 우리의 이야기들 일곱 편을 담았다.
작가 소개
최상희
『그냥, 컬링』으로 비룡소 블루픽션상을, 『델 문도』로 사계절문학상을, 단편 「그래도 될까」로 제3회 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바다, 소녀 혹은 키스』로 대산창작기금을, 이 소설집 『닷다의 목격』에 실린 단편 「화성의 플레이볼」과 「국경의 시장」으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그 밖에 『명탐정의 아들』, 『칸트의 집』, 『하니와 코코』, 『B의 세상』, 『마령의 세계』 등의 청소년소설과 『여름, 교토』, 『빙하맛의 사과』, 『숲과 잠』, 『북유럽 반할지도』 등의 여행책을 썼다.
목 차
닷다의 목격 7
제물 35
사과의 반쪽 57
그래도 될까 71
국경의 시장 95
화성의 플레이볼 121
튤리파의 도서관 151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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