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승과 저승, 용궁과 지옥을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와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가 어우러진 다섯 편의 비극
이승과 저승, 용궁과 지옥을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 다섯 편. 조선 전기의 학자 김시습이 쓴 한문소설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벼슬길을 버리고 평생 조선을 떠돌았다. 때때로 분노가 치밀면 미친 짓을 했고, 세상에 펼치지 못한 학식과 포부를 탁월한 글로 남겼다. 그 대표작이 《금오신화》다.
서해문집 청소년 고전문학 시리즈의 《금오신화》는 어려운 유·불교적 배경지식을 문장 안에 쉽게 풀고, 김시습이 인용한 옛이야기의 맥락과 낭만적인 시의 운율을 살리는 충실한 번역으로 고전의 멋을 전한다. 부처가 이어 준 기묘한 백년가약(〈만복사저포기〉), 죽은 아내와의 눈물겨운 재회(〈이생규장전〉), 달빛 아래 선녀와 주고받는 시 짓기(〈취유부벽정기〉), 쇳물 흐르는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펼치는 치열한 문답(〈남염부주지〉), 용왕의 초대로 신들과 더불어 즐기는 용궁 잔치(〈용궁부연록〉)를 묘사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일러스트는 이야기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고 청소년 독자의 몰입감을 높인다.
허무한 결말에 숨겨진 새로운 삶으로 가는 길
《금오신화》 속 인물들의 사연은 안타깝다. 전란에 휘말려 어린 나이에 죽거나 뛰어난 글재주에도 과거 급제에 실패하고, 결혼도 하고 벼슬도 얻지만 한순간에 스러지거나 반란에 왕족의 신분을 잃는 식이다. 이 취약한 세상을 등지는 다섯 주인공의 선택은 언제든 훼손될 수 있는 삶에서 스스로를 구해 보겠다는 노력에 가깝다.
결말을 현실 도피로 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양생은 귀신이 된 여인, 이생은 홍건적의 칼에 세상을 떠난 최랑의 영혼과 사랑을 나눈다. 홍생은 선녀와, 박생은 염라대왕과, 한생은 용왕과 교류한다. 초월적 인물과의 만남은 주인공이 운명의 짝을 얻는 순간이고 허망하게 잃은 연인을 되찾는 시간이다. 재능을 인정받아 신선이 되는 통로이며 불의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논의하는 장이자 귀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환대받는 경험이다. 무엇보다 이질적인 존재와 손잡고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는 ‘변화’의 계기다. 《금오신화》는 인물이 특정 시공간에서 겪는 일을 묘사해 재미와 교훈을 주는 옛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인물의 삶이 뒤바뀌는 ‘사건’을 겪는다는 점에서 한국 최초의 고전‘소설’로 정의된다.
이 소설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세계를 살아가는 미약한 인간이 쥐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하며 자신을 확장하고, 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 이전과 다른 삶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시습
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친가 외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다. 외가에서 자라면서 말을 배울 무렵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살 때 “난간 앞에 꽃 웃으나 소리 아니 들리고, 숲 아래 새 울지만 눈물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 구절을 듣고는 병풍의 꽃과 새를 가리켰다거나, 다섯 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許稠, 1369∼1439)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지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여럿 전해 온다. 소년의 천재성은 궁궐 안에까지 들려왔고, 세종은 그를 불러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내성적이며 부끄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과거엔 실패했고 집안은 빈한했다. 유년기의 충만감은 일순 공허감으로 뒤바뀌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곧 재취했다. 평생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18세 즈음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단종의 선위와 세조의 즉위(1455),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사육신 등의 죽음(1456), 단종의 죽음(1457) 등 정치적 격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여러 문헌에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8년, 24세의 김시습은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서른 살 무렵에 경주에 안착한다.
37세(1471)에 경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이듬해 수락산 동쪽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외부 활동과 교유를 자제하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주요 불교 저술을 지었다. 이 시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남효온(1454∼1492)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생육신으로 묶어 일컬었다. 47세에는 잠시 환속해 다시 결혼하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잠시 공부와 시작(詩作)의 방향이 유교로 급격하게 쏠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지 만 10년이 되는 1483년 봄,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남효온이 지은 시에 따르면, 김시습은 육경(六經)과 역사서 등을 싣고 관동의 산수를 돌아다니다가 농토를 얻어 생계를 꾸릴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이후 10년 그의 발걸음은 춘천, 홍천, 인제, 양양, 강릉 등지를 지났다. 오봉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에 머물렀다. 바닷가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 갔다.
1493년, 죽음을 직감한 코끼리가 깊은 동굴을 찾아들 듯이, 이승을 떠날 때가 된 김시습은 백제로 향했다. 무량사(無量寺), 지금은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절집에서 그는 평생 방랑에 지친 영혼을 안식한다.
그린이 : 이로우
자연과 상상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꿈과 현실 사이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전시, 상품 제작 등 개인 작업과 더불어 출판, 광고, 음반, 패션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브랜드와 축제의 아트 디렉팅을 담당했으며,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 『슈뢰딩거의 아이들』, 『너의 유니버스』, 『소나기 놀이터』 등 다수의 책 표지와 삽화를 그렸습니다.
옮긴이 : 이가원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 교수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연암소설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문 문집과 《열하일기》 번역을 비롯한 백여 권의 책을 냈다. 도산서원과 퇴계학연구원의 원장을 지냈다.
옮긴이 : 허경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최치원부터 허난설헌에 이르는 ‘한국의 한시’를 출간하고 있으며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 등을 지었다. 옮긴 책으로 《청소년을 위한 다산 정약용 산문집》 《서유견문》 《택리지》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만복사에서 저포 놀이한 이야기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본 이야기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부벽정에서 취해 놀았던 이야기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남쪽 저승을 구경한 이야기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용궁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해설 《금오신화》를 읽는 즐거움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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