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1973년 9.11, 그리고 아옌데, 피노체트, 라고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 나는 사임하지 않겠습니다. …… 민중의 가장 숭고한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기 위해 저는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탄압으로도 범죄 행위로도 역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래지 않아, 드넓은 가로수 길이 열려, 자유로운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다니리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역사는 우리의 편입니다. 역사란 민중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1973년 9월 11일 오전, 현직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쿠데타 군이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상공에 전투기가 선회하는 가운데, 국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칠레 국민들에게 이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이 쿠데타 군에 접수되자 곧 군가와 행진곡 흘러나왔고 중간중간 ‘포고령 제1호’ ‘포고령 제2호’…….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 사령관들은 대통령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연이어 발표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직원들을 청사 바깥으로 다 내보내고 홀로 총을 들고 저항하다 사망했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에 의해 칠레 전역에서는 대량 살육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명예를 지키며 죽어 간 이 대통령은 한때 유엔본부에서 각국 대표들로부터 사상 유래가 없는 박수갈채를 받았고,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좌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정치가였다.
당시 30대 중반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라고스는 주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민중예술가 빅토르 하라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쿠데타 군에 체포되어 국립경기장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요양하고 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계 각국에 내전을 막아 달라고 호소한 뒤에 끝내 목숨을 거두었다. 피노체트 장군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1992년까지 17년 동안 칠레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 사이 수천 명이 학살되고 실종되었으며 고문과 투옥, 망명으로 칠레는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하는 국가로, 피노체트는 독재의 대명사가 되었다. 권력에서 쫓겨나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런던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인도되었으나, 고령으로 처벌받지 않은 채 병으로 숨졌다.
두려움, 독재의 온상
이 책은 칠레 국민들이 억눌려 온 두려움을 몰아냄으로써 피노체트 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주의 칠레를 건설한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방송사고 한 건이 발생했고, 라고스는 이 ‘준비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1988년 4월 25일, 피노체트가 장기 집권을 위해 국민투표를 제안한 뒤 처음 열린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지은이는, 인터뷰 도중에 방송 카메라를 향해 갑자기 피노체트를 손가락으로 직접 겨누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피노체트 장군! 당신은 또다시 8년 동안이나 이 나라가 …… 고문과 암살, 인권유린을 겪도록 하려는 심사로군요. …… 특정 칠레인 한 사람이 25년 동안이나 권좌에 머물기 위해 이토록 뻔뻔스럽게 야망을 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 결코 그 누구도 그런 야심을 품은 적이 없지요. 당신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리카르도 라고스는 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면서 독재자의 표적이 되었지만, 피노체트 반대 세력이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고 중도좌파연합을 형성하여 정권을 교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시카고 보이’ 신자유주의 천국
정권을 장악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곧 ‘시카고 보이들’을 불러들였다. 1960년대 밀턴 프리드먼이 자리 잡고 있던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30여 명의 이 엘리트 집단은 국가 개입을 철회하고 공공 서비스를 줄이고 예산을 삭감하여, 근본적으로 칠레를 신자유주의 경제 천국으로 만들어 나갔다. 국유화된 회사들은 민영화시켰고 노동법이 개정되었고 연금과 보건의료의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일본의 나카소네가 집권하면서 전 세계로 파급된 신자유주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 단위로는 첫 실험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칠레 정부는 태양 전력 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고 개선된 전력 배전망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민간 회사와 경쟁하게 될지도 모르는 분야는 어디든지 정부가 사업을 하는 게 불법이기 때문이다.
정당연합과 집권의 드라마
산티아고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리카르도 라고스는, 1960년대 초 미국 명문 사립대학인 듀크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립 칠레대학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만 해도 엘리트 학자였다. 하지만 당시 라틴아?리카 나라들에 일반적인 불평등과 냉전 질서 속에서 그는 곧 실천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법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4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후보(당선에 실패함) 진영의 싱크탱크에서 정책 개발에 앞장섰고, 라틴아메리카사회과학부(FLACSO)의 사무총장으로 학술사업을 펼쳤다. 1970년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권이 집권한 뒤 유엔에 칠레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고 1973년에는 아옌데의 간곡한 요청으로 주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그해 9월 1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남으로써 곧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1978년 귀국하여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시카고 보이들’이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항하는 노동과 실업, 도시 이주, 공공복지와 불평등 문제에 관한 학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진보 사상과 개념을 만들어 내는 싱크탱크 ‘벡토르’(전위)가 꾸려졌고, 그 중심에 있던 라고스는 마침내 ‘사회당 통합위원회’(CPU)를 구성한 뒤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1983년 9월에는 재통합된 사회당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여 노동조합이나 공산당까지 접촉하며 반피노체트 전선을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피노체트 독재를 탄핵하고 과도정부를 세워 우리의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한다”고 명시한 민주주의연합(AD)이 결성되었다. 보수야당인 기독교민주당은 물론 자유주의자까지 포함된 반피노체트 전선은 결국 대중 집회와 전국을 돌며 국민투표 유권자 등록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88년 2월 2일 마침내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지지하는 모든 정당들의 집합체인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이 공식 출범했다.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깃발 아래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급진당 등 17개 정당이 모였고, 그해 치러진 10월 5일 국민투표에서 칠레 사람들은 찬성 43%, 반대 54%로 피노체트 독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기독교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콘세르타시온 단일후보가 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에 이어 1994년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리카르도 라고스는 콘세르타시온이 집권한 두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과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일하며, 교육개혁과 공공 사회기반 시설 확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2000년에는 드디어 콘세르타시온 후보로 우파의 호아킨 라빈을 꺾고 살바도르 아옌데 이후 사회주의자로서 30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칠레 만들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칠레의 대통령으로 6년 동안, 라고스는 과감하고 슬기로운 정책으로 칠레 국민들에게 봉사했다. 그것은 민주주의, 경제성장, 사회적 평등이라는 튼튼한 세 다리로 설 수 있다는 이른바 ‘삼각대 정부 이론’이었다. 물론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을 만한 정책이었지만, 임기가 끝나고 같은 당의 후임 미첼레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정부를 물려줄 때까지 초지일관했다.
민주정부 아래에서 1인당국민소득은 1만5천 달러를 달성했고 해외 자본 투자는 급격하게 늘었다.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국토를 잇는 고속도로, 대도시의 지하철과 버스 시스템, 낙후된 지역의 상하수도와 전력 공급 등 공공 인프라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실업률이 눈에 띄게 감소했을 뿐 아니라 유아 사망률, 여성의 건강, 기대 수명에 이르기까지, 측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진보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경제학자로 인도한 ‘불평등’의 문제는 개혁 프로그램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교육, 조세제도, 주택, 의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평등과 재분배 정책은 양극화되어 있던 사회를 재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역동적인 사회적 주택 보급 사업 ‘카사 라고스,’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AUGE), 연금제도와 실험보험 같은 개혁을 기득권의 큰 반발 없이 이루어 갔고, 극빈층을 위한 ‘가정 도우미,’ 지역공동체 봉사활동 프로그램 ‘칠레연대,’ 여성들을 위한 치과 서비스 ‘여성의 미소’에 이르는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임기 중에 미국, 유럽연합이라는 세계의 양대 시장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수출 중심의 칠레 경제를 확대시켰다.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직접 전 세계를 날아다니며 협상했고 칠레의 이익을 대변하고 설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한-칠레 FTA’도 라고스 임기 중에 체결되어, 칠레산 포도주와 과일은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갔다.
진실과 화해
라고스 정부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정부와 함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사회가 보여 준 과거사 정리의 모델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군부독재 아래에서 희생당한 실종자 확인과 조사를 위한 ‘레티그위원회’와 군부, 가톨릭교회, 인권활동가, 법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실종자들의 생사를 밝히고 시신을 찾는 ‘메사 데 디알로고’(대화 테이블), 역사적 진실 규명과 화해, 보상을 위한 ‘발레크위원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갈라진 칠레 사회를 치유해 나갔다. 고문, 투옥, 실종, 학살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이나 오랜 세월 해외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해온 민주화 운동가들은 그제서야 칠레 ‘국민’으로 합류했다. 대통령은 칠레 정부를 대표하여 육군 총사령관은 군부를 대표하여 칠레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대통령 이후의 삶
대통령 퇴임 후 리카르도 라고스는 세계 전직 대통령들의 모임인 ‘마드리드클럽’의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미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의 기후변화특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이는 에필로그에 퇴임한 대통령의 소회와 성찰을 덧붙이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는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 대통령 임기는 항상 너무 짧고, 여러 결정은 긴급한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성취하려고 하는 모든 일이 4년이나 6년 만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현직을 떠나서야 비로소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임기가 주던 한계를 뛰어넘는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치(사실은 책임감이지만)를 누리게 된다. 고작 몇 년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 자기 나라가 걸어갈 길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더 이상 의사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때로는 협소한 정당정치의 한계를 벗어나 생각하도록 우리 사회를 북돋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퇴임한 뒤에 할 수 있는 질문은 깊이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가 빨리 바뀌는 만큼 질문도 변하게 마련이다. 임기 중에 끝내지 못한 프로젝트에서부터 원하던 대로 실행되지 않은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한 실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재임 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인 정부 구조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변화를 좌절시킨 무언가가 시스템 자체에 있지는 않았던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이 비망록을 읽고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써서 보냈다.
“50년 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자유승차 캠페인을 목격한 바로 그 대학생은, 선의가 있지만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을 단순히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불평등(특히 제도화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친구 리카르도는 칠레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지속되는 불평등과 싸우는 노력을 결코 뒤로 미루지 않았다. 특유의 낙관주의와 독창성은 한 데 어우러져 이 책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어두운 시대로부터 다시 떠오르고 있는 칠레 현대사에 익숙한 독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칠레의 새로운 활력과 이 탁월한 정치가의 역할에서 무척 새로운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이 퇴임한 뒤 2006년에 사회당의 미첼레 바첼레트가 후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현재는 201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우파 ‘변화를 위한 연합’의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집권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 : 리카르도 라고스
Richardo Lagos
칠레 대통령(2000~2006년)을 지내고, 현재 유엔 기후변화특사로 활동하고 있다. 듀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 칠레대학 교수, 총장을 지냈다. 아옌데 정부에서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귀국하여 사회당, 민주당, 콘세르타시온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낸 뒤 아일윈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프레이 정부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0년 중도좌파정당연합 콘세르타시온의 대통령 후보로서 우파 호아킨 라빈에게 승리함으로써, 살바도르 아옌데 이후 17년 만에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되었다.
역 : 정진상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에 관한 장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입시지옥과 학벌사회를 넘어》, 《교사의 사회의식과 전교조》,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선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빌 클린턴)
머리말
1. 독재자를 겨눈 손가락
2. 쿠데타
3. 시카고 보이
4. 중도좌파 연합, 콘세르타시온
5. 선거 승리와 집권
6. 해 뜨는 아침
7. 피토체트의 유령
8. 칠레의 길
9. 부시와 후세인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1973년 9.11, 그리고 아옌데, 피노체트, 라고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 나는 사임하지 않겠습니다. …… 민중의 가장 숭고한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기 위해 저는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탄압으로도 범죄 행위로도 역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래지 않아, 드넓은 가로수 길이 열려, 자유로운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다니리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역사는 우리의 편입니다. 역사란 민중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1973년 9월 11일 오전, 현직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쿠데타 군이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상공에 전투기가 선회하는 가운데, 국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칠레 국민들에게 이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이 쿠데타 군에 접수되자 곧 군가와 행진곡 흘러나왔고 중간중간 ‘포고령 제1호’ ‘포고령 제2호’…….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 사령관들은 대통령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연이어 발표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직원들을 청사 바깥으로 다 내보내고 홀로 총을 들고 저항하다 사망했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에 의해 칠레 전역에서는 대량 살육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명예를 지키며 죽어 간 이 대통령은 한때 유엔본부에서 각국 대표들로부터 사상 유래가 없는 박수갈채를 받았고,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좌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정치가였다.
당시 30대 중반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라고스는 주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민중예술가 빅토르 하라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쿠데타 군에 체포되어 국립경기장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요양하고 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계 각국에 내전을 막아 달라고 호소한 뒤에 끝내 목숨을 거두었다. 피노체트 장군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1992년까지 17년 동안 칠레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 사이 수천 명이 학살되고 실종되었으며 고문과 투옥, 망명으로 칠레는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하는 국가로, 피노체트는 독재의 대명사가 되었다. 권력에서 쫓겨나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런던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인도되었으나, 고령으로 처벌받지 않은 채 병으로 숨졌다.
두려움, 독재의 온상
이 책은 칠레 국민들이 억눌려 온 두려움을 몰아냄으로써 피노체트 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주의 칠레를 건설한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방송사고 한 건이 발생했고, 라고스는 이 ‘준비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1988년 4월 25일, 피노체트가 장기 집권을 위해 국민투표를 제안한 뒤 처음 열린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지은이는, 인터뷰 도중에 방송 카메라를 향해 갑자기 피노체트를 손가락으로 직접 겨누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피노체트 장군! 당신은 또다시 8년 동안이나 이 나라가 …… 고문과 암살, 인권유린을 겪도록 하려는 심사로군요. …… 특정 칠레인 한 사람이 25년 동안이나 권좌에 머물기 위해 이토록 뻔뻔스럽게 야망을 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 결코 그 누구도 그런 야심을 품은 적이 없지요. 당신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리카르도 라고스는 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면서 독재자의 표적이 되었지만, 피노체트 반대 세력이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고 중도좌파연합을 형성하여 정권을 교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시카고 보이’ 신자유주의 천국
정권을 장악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곧 ‘시카고 보이들’을 불러들였다. 1960년대 밀턴 프리드먼이 자리 잡고 있던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30여 명의 이 엘리트 집단은 국가 개입을 철회하고 공공 서비스를 줄이고 예산을 삭감하여, 근본적으로 칠레를 신자유주의 경제 천국으로 만들어 나갔다. 국유화된 회사들은 민영화시켰고 노동법이 개정되었고 연금과 보건의료의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일본의 나카소네가 집권하면서 전 세계로 파급된 신자유주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 단위로는 첫 실험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칠레 정부는 태양 전력 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고 개선된 전력 배전망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민간 회사와 경쟁하게 될지도 모르는 분야는 어디든지 정부가 사업을 하는 게 불법이기 때문이다.
정당연합과 집권의 드라마
산티아고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리카르도 라고스는, 1960년대 초 미국 명문 사립대학인 듀크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립 칠레대학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만 해도 엘리트 학자였다. 하지만 당시 라틴아?리카 나라들에 일반적인 불평등과 냉전 질서 속에서 그는 곧 실천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법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4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후보(당선에 실패함) 진영의 싱크탱크에서 정책 개발에 앞장섰고, 라틴아메리카사회과학부(FLACSO)의 사무총장으로 학술사업을 펼쳤다. 1970년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권이 집권한 뒤 유엔에 칠레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고 1973년에는 아옌데의 간곡한 요청으로 주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그해 9월 1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남으로써 곧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1978년 귀국하여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시카고 보이들’이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항하는 노동과 실업, 도시 이주, 공공복지와 불평등 문제에 관한 학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진보 사상과 개념을 만들어 내는 싱크탱크 ‘벡토르’(전위)가 꾸려졌고, 그 중심에 있던 라고스는 마침내 ‘사회당 통합위원회’(CPU)를 구성한 뒤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1983년 9월에는 재통합된 사회당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여 노동조합이나 공산당까지 접촉하며 반피노체트 전선을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피노체트 독재를 탄핵하고 과도정부를 세워 우리의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한다”고 명시한 민주주의연합(AD)이 결성되었다. 보수야당인 기독교민주당은 물론 자유주의자까지 포함된 반피노체트 전선은 결국 대중 집회와 전국을 돌며 국민투표 유권자 등록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88년 2월 2일 마침내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지지하는 모든 정당들의 집합체인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이 공식 출범했다.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깃발 아래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급진당 등 17개 정당이 모였고, 그해 치러진 10월 5일 국민투표에서 칠레 사람들은 찬성 43%, 반대 54%로 피노체트 독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기독교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콘세르타시온 단일후보가 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에 이어 1994년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리카르도 라고스는 콘세르타시온이 집권한 두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과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일하며, 교육개혁과 공공 사회기반 시설 확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2000년에는 드디어 콘세르타시온 후보로 우파의 호아킨 라빈을 꺾고 살바도르 아옌데 이후 사회주의자로서 30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칠레 만들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칠레의 대통령으로 6년 동안, 라고스는 과감하고 슬기로운 정책으로 칠레 국민들에게 봉사했다. 그것은 민주주의, 경제성장, 사회적 평등이라는 튼튼한 세 다리로 설 수 있다는 이른바 ‘삼각대 정부 이론’이었다. 물론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을 만한 정책이었지만, 임기가 끝나고 같은 당의 후임 미첼레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정부를 물려줄 때까지 초지일관했다.
민주정부 아래에서 1인당국민소득은 1만5천 달러를 달성했고 해외 자본 투자는 급격하게 늘었다.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국토를 잇는 고속도로, 대도시의 지하철과 버스 시스템, 낙후된 지역의 상하수도와 전력 공급 등 공공 인프라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실업률이 눈에 띄게 감소했을 뿐 아니라 유아 사망률, 여성의 건강, 기대 수명에 이르기까지, 측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진보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경제학자로 인도한 ‘불평등’의 문제는 개혁 프로그램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교육, 조세제도, 주택, 의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평등과 재분배 정책은 양극화되어 있던 사회를 재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역동적인 사회적 주택 보급 사업 ‘카사 라고스,’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AUGE), 연금제도와 실험보험 같은 개혁을 기득권의 큰 반발 없이 이루어 갔고, 극빈층을 위한 ‘가정 도우미,’ 지역공동체 봉사활동 프로그램 ‘칠레연대,’ 여성들을 위한 치과 서비스 ‘여성의 미소’에 이르는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임기 중에 미국, 유럽연합이라는 세계의 양대 시장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수출 중심의 칠레 경제를 확대시켰다.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직접 전 세계를 날아다니며 협상했고 칠레의 이익을 대변하고 설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한-칠레 FTA’도 라고스 임기 중에 체결되어, 칠레산 포도주와 과일은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갔다.
진실과 화해
라고스 정부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정부와 함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사회가 보여 준 과거사 정리의 모델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군부독재 아래에서 희생당한 실종자 확인과 조사를 위한 ‘레티그위원회’와 군부, 가톨릭교회, 인권활동가, 법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실종자들의 생사를 밝히고 시신을 찾는 ‘메사 데 디알로고’(대화 테이블), 역사적 진실 규명과 화해, 보상을 위한 ‘발레크위원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갈라진 칠레 사회를 치유해 나갔다. 고문, 투옥, 실종, 학살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이나 오랜 세월 해외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해온 민주화 운동가들은 그제서야 칠레 ‘국민’으로 합류했다. 대통령은 칠레 정부를 대표하여 육군 총사령관은 군부를 대표하여 칠레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대통령 이후의 삶
대통령 퇴임 후 리카르도 라고스는 세계 전직 대통령들의 모임인 ‘마드리드클럽’의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미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의 기후변화특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이는 에필로그에 퇴임한 대통령의 소회와 성찰을 덧붙이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는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 대통령 임기는 항상 너무 짧고, 여러 결정은 긴급한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성취하려고 하는 모든 일이 4년이나 6년 만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현직을 떠나서야 비로소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임기가 주던 한계를 뛰어넘는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치(사실은 책임감이지만)를 누리게 된다. 고작 몇 년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 자기 나라가 걸어갈 길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더 이상 의사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때로는 협소한 정당정치의 한계를 벗어나 생각하도록 우리 사회를 북돋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퇴임한 뒤에 할 수 있는 질문은 깊이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가 빨리 바뀌는 만큼 질문도 변하게 마련이다. 임기 중에 끝내지 못한 프로젝트에서부터 원하던 대로 실행되지 않은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한 실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재임 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인 정부 구조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변화를 좌절시킨 무언가가 시스템 자체에 있지는 않았던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이 비망록을 읽고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써서 보냈다.
“50년 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자유승차 캠페인을 목격한 바로 그 대학생은, 선의가 있지만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을 단순히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불평등(특히 제도화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친구 리카르도는 칠레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지속되는 불평등과 싸우는 노력을 결코 뒤로 미루지 않았다. 특유의 낙관주의와 독창성은 한 데 어우러져 이 책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어두운 시대로부터 다시 떠오르고 있는 칠레 현대사에 익숙한 독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칠레의 새로운 활력과 이 탁월한 정치가의 역할에서 무척 새로운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이 퇴임한 뒤 2006년에 사회당의 미첼레 바첼레트가 후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현재는 201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우파 ‘변화를 위한 연합’의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집권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 : 리카르도 라고스
Richardo Lagos
칠레 대통령(2000~2006년)을 지내고, 현재 유엔 기후변화특사로 활동하고 있다. 듀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 칠레대학 교수, 총장을 지냈다. 아옌데 정부에서 소비에트 칠레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귀국하여 사회당, 민주당, 콘세르타시온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낸 뒤 아일윈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프레이 정부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0년 중도좌파정당연합 콘세르타시온의 대통령 후보로서 우파 호아킨 라빈에게 승리함으로써, 살바도르 아옌데 이후 17년 만에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되었다.
역 : 정진상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에 관한 장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입시지옥과 학벌사회를 넘어》, 《교사의 사회의식과 전교조》,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선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빌 클린턴)
머리말
1. 독재자를 겨눈 손가락
2. 쿠데타
3. 시카고 보이
4. 중도좌파 연합, 콘세르타시온
5. 선거 승리와 집권
6. 해 뜨는 아침
7. 피토체트의 유령
8. 칠레의 길
9. 부시와 후세인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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