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980년대 생활문화 속 자율과 통제의 시간정치
모두가 자기개발의 주체가 되는 신자유주의의 서막
1980년대의 시간정치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시간이 사회발전과 자기개발을 위한 대상이 되는 과정, 즉 신자유주의적 시간의 기원을 탐색하는 책 『24시간 시대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저자 김학선은 1980년대에 하루 24시간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원으로 적극 개발되고 활용되는 점에 주목하며 통치규율, 자원으로서의 시간, 국민국가의 시간제도 등의 측면에서 1980년대의 시간정치를 고찰한다. 기존의 1980년대 담론이 주로 정치적으로 상반된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명하거나 그 갈등의 은폐와 봉합의 요인으로 소위 ‘3S정책’이나 경제발전 등을 주목했다면 이 책은 당대의 시간정치를 통해 국가와 국민, 정치와 일상의 경합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야간통금 해제, 신군부 정권의 방송정책과 ‘국민생활시간조사’, 서머타임제, 법정공휴일과 국가기념일 등 1980년대의 다양한 시간제도와 그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을 광범위하게 포착하면서 여러 주체들의 시간성을 둘러싼 갈등의 양상을 구체적이고 폭넓은 시각으로 분석한다. 또한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진 시간부족, 시간압박의 심리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서 신자유주의적 시간관념을 사유하는 데 역사적 맥락과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이다.
1980년대 신군부의 해제와 통제의 시간정치
: ‘자율’이라는 통치규율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지적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등장한 신군부는 ‘새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이전 정권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야간통행금지제도를 철폐하는 등 개방정책과 자율화·자유화 조치를 잇달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신군부 정권이 국민에게 24시간의 자유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신군부가 야간통금 해제를 통해 ‘자율’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규율로 천명하고 국민의 24시간을 통치의 수단이자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음을 예리하게 설파해낸다. 또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어 24시간 이용이 자유로워지자 자본의 순환은 빨라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가속도가 붙은 시간은 1980년대 사회로 하여금 쉼 없이 신자유주의적 속도 경쟁으로 나아가게 했음을 지적한다. 특히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급속히 신자유주의의 영향하에 들어가면서 시간관리의 주체는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로써 신자유주의하의 개인은 자기 시간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관리하고 조직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3장 낮과 밤의 경계가 없어지다)
한편 1980년대의 국민은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 국기하강식 등 일상적 국민의례를 통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을 표하는 시간을 매일 가져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시작한 이 국민의례는 1980년대 들어 더욱 강화되고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애국심의 표현을 강제하는 것은 신군부 정권이 새로운 사회규율로 내세운 ‘자율’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과 국기하강식에 대한 반대여론이 점차 커지자 1989년 1월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이 밖의 등화관제 훈련, 대학 군사교육 역시 1980년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저자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동원된 국민의 일상시간을 영화, 신문기사, 문학작품, 통계 등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면서 강제된 ‘자율’을 둘러싼 사회적 반발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자율’이라는 통치규율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면밀하게 검토한다.(4장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동원된 일상시간)
자원으로 개발된 국민의 일상시간
: TV 전성시대, 생활리듬이 동시화되다
1980년대에는 ‘국민생활시간조사’가 시작되어 정례화되었다. 한국방송공사(KBS)는 국익과 건전한 사회풍토를 조성하고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1981년부터 격년으로 4차례 ‘국민생활시간조사’를 실시했다. 저자는 이 조사과정에서 국민의 일상시간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관리·조직되어야 하는 하나의 자원으로 개념화되었고, 국민은 시간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주체로 선언되었다고 분석한다. 국민의 일상시간이 국가의 자원으로 개념화됨으로써 국내적으로는 국민을 재결집하고 동원하는 자원으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는 국가 간 경쟁에 필요한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5장 국민의 시간자원 개발) 정례화된 국민생활시간조사는 텔레비전 편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공영방송체제로 운영된 1980년대의 텔레비전은 아침방송의 재개, 컬러방송과 TV과외의 시작 등 방송환경, 방송시간, 방송편성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국민의 일상시간이 자원으로 취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생활리듬이 동시화되기에 이르렀음을 구체적 통계를 통해 실증해 보인다.(6장 또 하나의 국민시계 텔레비전/7장 모든 길은 텔레비전으로 통한다)
한편 1961년에 폐지된 서머타임제의 재도입 문제가 1985년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신군부 정권은 일광절약시간제가 필요한 까닭으로 국민의 근면성 고취, 에너지 절약, 국민의 여가와 자기발전 욕구 충족, 국민보건의 향상 등을 들면서 서머타임제를 순전히 국민을 위해 실시하는 것처럼 언명했다. 그러나 서머타임제 도입은 미국의 서울올림픽 중계시간과 이에 따른 중계권료 협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두차례의 서머타임제가 종료되자 이 제도에 대해 주체성을 상실한 시간제도, 즉 올림픽 중계권료를 위해 국민의 시간을 저당잡힌 제도라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서머타임제 실시는 애초에 내건 ‘자유시간의 증가’는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노동시간이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서머타임제를 통해 국민이 일상적인 시간과 글로벌 시간체제가 접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고, 글로벌 시간제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8장 세계시간 속의 대한민국)
시간을 둘러싼 국가와 국민의 경합
: 신군부의 통치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대결하다
공휴일 및 국가기념일의 제정과 운용은 시간주권과 국가정체성을 표방하는 데 활용될 뿐만 아니라 국민통합과 사회통제에도 이용된다. 1980년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법정공휴일의 내용이나 그 일수에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시기로, 법정공휴일 제도가 생긴 이후로 법정공휴일이 가장 증가했다. 특히 이전에는 법정공휴일이 되지 못했던 음력 명절인 설날이 1989년 사흘 연휴가 되었고, 하루 휴일이었던 추석 역시 사흘 연휴가 됨으로써 설과 추석이 국가의 시간제도 안에 안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정통성이 취약한 신군부 정권이 국민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수시로 정한 임시공휴일 역시 다른 시기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 임시공휴일 제도는 국민을 동원하거나 위무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이다.(9장 국가의 공식시간과 국민의 생활시간) 한편 1980년대 들어 학생의 날을 재지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정부의 독점적 권한인 법정기념일의 규정과 운용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80년 중반에 이르면 학생과 노동자는 더이상 통치자의 국가기념일 지정에 의해 호명되는 피동적인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폐지된 학생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재지정하자는 건의가 잇따랐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생의 날들이 법정기념일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국가의 시간 속에서 기념되던 대상이 사회세력 간의 갈등과 그 투쟁에 의해 수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10장 국가의 기억과 기념의 시간정치)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갈등과 변동을 겪으면서도 어째서 분열되거나 붕괴하지 않고 민주화를 이뤄내면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군부의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고자 열망했지만, 신군부는 그를 폭압적으로 억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제5공화국의 탄생 및 군사정권의 유지는 국민들의 동원과 협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것은 기존 군사정권의 방식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1980년대의 정권은 억압과 통제 일색의 통치성을 일상시간의 기획을 통해서 개방과 자율로 포장함으로써 국민들을 동원하고자 했다.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제5공화국을 중심으로 신군부 정권과 당시 국민들이 일상시간의 기획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킨 과정을 중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과 각 주체들이 사회적 시간을 둘러싸고 다툼, 경합, 동의, 협력을 통해서 당시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독자들은 1980년대의 사회상을 입체적이고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보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기대한다.
작가 소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학부 때에는 한국 현대소설에 관심이 많았으나,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의 어학당과 교양학부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면서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쳤다. 석사과정 중에는 제3국행 한국전쟁 포로의 정체성과 귀속 문제에 대해, 박사과정 중에는 1980년대 사회적 시간의 개발과 재구성에 대해 논문을 썼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시간 가속화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목 차
제1부 1980년대 시간성의 충돌
1. 근대적 시간체제의 도입과 형성
근대적 시계시간의 특징
근대적 시간기획의 주요 주체
시간규율, 시간자원, 시간주권
대한민국과 근대적 시간체제
2. 1980년대 사회적 시간의 비동시성
1980년대 사회의 불일치
1980년대 다양한 시간성
제2부 해제와 통제의 시간정치
3. 낮과 밤의 경계가 없어지다
야간통행금지제도의 역사
야간통금의 위헌성과 자의성
서울올림픽과 야간통금 해제
정상화의 주체: 제5공화국과 전두환
제5공화국의 ‘자율’: 자발적 발전주체의 윤리
노동과 경쟁의 자유: 시간 부족감과 시간 압박감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와 분화
새로운 성과주체, 1980년대 중산층
24시간 경제 시대의 개막과 그 파행성
4.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동원된 일상시간
군·관·민이 하나 된 등화관제 훈련
교련복, 군복, 예비군복
국가에서 배급하는 애국의 시간
강제된 ‘자율’의 이중성과 모순성
균열의 가속화: 국제적 시선과 민주화로의 이행
제3부 국민의 일상시간, 자원으로 개발되다
5. 국민의 시간자원 개발
‘국민생활시간조사’와 시간자원 담론
1980년대 국가정책과 국민생활시간의 변화
국민생활시간, 국가경쟁력의 지표
6. 또 하나의 국민 시계, 텔레비전
신군부 정권의 텔레비전 편성정책: 국익과 건전 풍토 조성
‘TV과외’: 새로운 방송시간대의 개척
컬러방송: 텔레비전 매개성의 강화
아침방송: 일상시간의 재구조화
1980년대 텔레비전 뉴스: 규칙성과 현실구성성
프로야구 중계방송: 주기성과 결집성
TV 전성시대: 생활시간과 리듬의 동시화
7. 모든 길은 텔레비전으로 통한다
텔레비전 이벤트의 시대
KBS 시청료 거부운동: 시청료 대 수신료
TV 시청과 국민의 알 권리
제4부 시간을 둘러싼 국가와 국민의 경합
8. 세계시간 속의 대한민국
국제표준시와 일광절약시간제: 통치자의 독점권
1980년대 서머타임제
길어진 낮, 길어진 노동
서머타임 피로
여가활동의 변화: TV 집중화의 심화
시간주권 의식의 성장
9. 국가의 공식시간과 국민의 생활시간
국경일과 법정공휴일: 근대적 국민국가의 명절
양력일원제 대 음·양력 이원제
법정공휴일 제도 밖의 전통 명절
1980년대 명절: 민속공동체로서의 국민 호명
1980년대 법정공휴일의 시간정치
10. 국가의 기억과 기념의 시간정치
1980년대 법정기념일
재호명된 기념 대상: 교원, 군인, 학생
새로운 국가 기억과 기념 주체: 학생, 노동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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