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아니다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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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배막희
출판사항서정문학, 발행일:2020/12/15
형태사항p.180 46판:20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9115503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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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시인의 말


한 마디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을 줄도 안다.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만남을 갖게 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을 준다는 것이 참 좋다. 낙타의 눈물을 품고 모래 알 같은 감성을 장착하고 지낸다. 쓰윽 한번 읽고 무심히 또 뒤적여보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망 하나 이루어가는 이런 걸음이 좋다. 덕분에 고맙소, 안상조 이훈식 발행인님, 차영미 대표님 감사드립니다.


내면의 소리 그 큰 울림


이훈식(시인. 서정문학 발행인)


먼저 배막희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축하드린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마다 다르겠지만 살면서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그나마 문자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표출하고자 하는 창조행위이며 좀 더 미래지향적인 세계로 승화시켜보려는 긍정적인 욕망이다. 어쩌면 시인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쓰다가 새롭게 얻어지는 사물과 대상對象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요,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기도 하다. 또한, 시는 시인에게 잠재되어 있던 결핍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혼탁하고 어려운 세상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대에 시를 통해 소통하고 시를 통해 자아정체성을 찾아보고 확인하려는 본능에 가까운 욕구 그게 문학이고 시이다.


문학의 효용성 중의 하나는 쌓여 있던 감성을 배설함으로써 오는 청량감이요, 기존의 진부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고 그리움이다. 오직 자신만의 이름으로 대상을 부르고 자신만의 이름으로 나누고 싶은 세계, 그게 시인이 꿈꾸는 유토피아이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자아표출로 시작되는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구상 시인).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행위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원초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시는 문학이라는 장르 중에 가장 밑바탕이 되며 끊임없이 나를 향한 발걸음의 길이다. 어떤 소재이든 대상이든 시인이 새롭게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이미 꽃은 꽃이 아니고 이별은 이별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내재한 사유를 통하여 인식된 사건은 시인 안에서 다시 태어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배 시인의 시는 희로애락의 정서가 가슴 안에서 한 번 삭혀졌다가 다시 토해놓은 시어들이 따스한 붓놀림으로 살아날 때면 하얀 눈물마저 그리움이 되고 아물지 못한 상처마저도 소중한 기억으로 살아나 가슴에 풀물 들듯 배여든다. 조금은 어눌한 것 같으면서도 할 말은 다하고 마는 뼈대가 강한 시어들이 그간 시인이 살아온 날들을 조명해주고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물음이 되고 대답이 되는 시들이 곳곳에서 붉은 맥박으로 뛴다. 예쁘게 살아 있는 시들을 대할 때마다 동질감 속에서 느끼게 되는 그 친밀감이 배 시인의 시의 정서이다. 단순히 소재에 대한 관찰자 입장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부하고 되씹어보는 주관자로서의 시어들이 밀도 있게 행간을 채우고 있다.


1부 봄, 그 서늘함에 대해


무관심 속의 그것은 풋것이었던 적이 있었다
바쁘게 변해 버린 중년의 하루 앞에
별도의 것으로 원래의 영역을 차지하고 띄엄띄엄
익어갔다
많지 않은 날에 그것 한번 바라보며 걸었고
많지 않은 날에 그것 한번 차마 만지지도 못한 것
허리가 펴지지 않던 깔딱고개가 끝날 때쯤
빈 손바닥을 들이 밀고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걸
저 새큼한 것은 알기나 했었는지
― 「그 나무의 열매-버찌」 일부


시는 상상력을 통한 꿈과 그리움이 주류를 이룬다. 배 시인은 버찌라는 열매를 두고 단순한 외향적 의미의 재생이 아니라 지난날에 의미들을 되새기며 “저 새큼한 것은 알기나 했었는지” 무관심했던 지나간 날의 기억을 내재적 의미로 담아내고 있다. 표피적인 사고를 떠나 되새김질로 육화된(incarnation) 언어로 소재가 주는 이미지를 자기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깔딱고개 같은 삶이었다는 원관념은 행간 속에 감춰놓고 버찌가 새큼한 열매로 맺히기까지를 보조관념으로 삼아 조곤조곤 이끌어 낸 시어들이 마디마디 살아서 움직인다.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확대하기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통해 자기성찰의 도구로 삼아보려는 작업이 신선하다. 그간의 쌓인 연륜 없이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기법이다. 끝없는 상상을 통해 인식된 사물을 자기 안에서 투영해 보려는 시인의 감성이 이성을 앞서고 있음을 본다. 데미안 서문에서 헤르만 헤세는 이성보다 감성으로 살기를 원했으나 그게 더 힘들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시는 해석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하나 보다.


휘파람 소리를 내는 단절의 아름다움은
절정과 함께 끝이 나고 말았다
광기의 눈을 부라리며
광란의 몸으로 드러누운 충혈된 주검은
존재를 저항하는 분노
― 「동백」 일부


오늘 그 집의 그 여잔
커피 잔은 밀쳐두고 엎어진 화투장을 일으키며
눈두덩이에 살을 채우고 있었나 보다
포로가 된 듯 창문 앞에 앉은 남자의
화투장이 늙어가는 관절을 끊으며 패대기 쳐진다
이렇게 슬프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날
분노가 들고날 수 있게 문을 열어 두었나
문을 닫아두고 오래된 커피 잔을 씻던
빨간 루즈를 바른 나이 든 여자는 이제 없다
― 「바닷가 그 다방」 일부


위에 두 시를 보면 얼마나 치열하게 시어와 싸워 왔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 시어와 싸움은 침체된 사유에 끌려다니기보다는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이요, 끝까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눈금 없는 저울로 한 번쯤 달아보려는 몸부림이요, 살아 있음의 비명이다. 진정 내가 누구냐는 말을 화두로 삼고 생멸의 길에서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영혼을 만나 보려는 열정이다. 봄이 오는 길목은 참으로 많은 회고가 있다. 겨울이 그렇고 사는 게 그렇다. 죽어가는 흔적 또한 그렇다. 낙화가 된 붉은 동백을 보고 존재를 저항하는 분노라는 표현이 아주 당차다. 또한 그 다방의 화투장을 패대기치는 여인을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시인처럼 읽는 사람도 아프게 한다.


‘시인은 누구인가 ’ 누군가는 천형天刑을 앓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근원적으로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시인은 무사무욕無私無慾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요. 외로움을 물 말아먹고 살아도 부러움이 없는 지족자知足者이다. 그래서 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가끔 가난한 영혼을 위한 시어들에서 눈물 타는 냄새가 난다.


뱃속의 아이처럼
의식의 깊은 부분까지
자라고 자라서
뱃속을 빠져나가야 할 시간까지


검은 눈물로 키운다
애초에 불구자인 너를
― 「한 편의 시를 낳다」 일부


시는 마지막 행이 살아나면 시 전체가 살아나고 마지막 행이 죽으면 시 전체가 죽어버린다. 그걸 알고 쓰는 시인이 많지 않다. 시는 은유이며 함축이라는 말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애초에 불구자인 너를” 이 마지막 행이 그 모든 걸 얘기해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장난기 많은 소녀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여인 같기도 하다. 평범하면서도 그 평범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삶의 진실을 들여다보고 그 본질에 관해 직설적인 화법이 아니라 은유가 주는 간접화법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어들이 정겹다. 러시아의 어느 시인은 시는 머리나 가슴으로 쓰는 게 아니라 피로 쓰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 애초의 불구자인 너를 사랑한 게 죄이다. 너를 더 사랑할까 그게 두렵다.


2부 여름, 그 뜨거움을


배 시인은 모든 소재에 자신을 같은 수평선 상에다 올려다 놓고 독백하듯 시상을 풀어놓고 있다. 어떤 소재이든 이성적이면서도 감각적 표현으로 행간을 메우는 배 시인은 순간순간 부딪쳐오는 시상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언어로 형상화 시키는 솜씨는 오랜 습작 기간이 가져다준 경륜이거나 아니면 타고난 재능이다. 남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갈 일상인데 독특한 시인의 시각으로 저마다 아름다운 이름표를 달아주는 능력을 칭찬해 주고 싶다. 작은 흔들림을 큰 울림으로 묘사하는 맛깔스러운 사유의 노래,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음으로 스며드는 언어들이 사진 속 배 시인을 닮았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이미지 그것이 2부에서 보이는 배 시인의 시이
다.


어미 아비와 풀 뜯던
구릉진 언덕 위에 너 하나 남아서
늙은 풀뿌리를 품고 앉아
꾸엑꾸엑 빈 창자를 끌어올리며 울고 있다


휘청이는 작은 몸이 풀잎처럼 떨리며 울어대다가
사막의 모래 바람처럼 휘날리며 절규한다
토악질을 하고 비를 맞으며 비탈을 오르고 내린다


어린 염소야
너의 어미 아비는 구릉 진 그 언덕을 떠나서
널 적시는 비바람이 되고 말았나 보다
― 「염소」 일부


기뻐서 흘리는 눈물과 슬퍼서 흘리는 눈물의 성분이 다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절대 고독 앞에 홀로 선 존재…, 울고 싶을 때는 아기염소처럼 세상 떠나가도록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야 한다. 그래야 여름밤 소쩍새 울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는 노을이 햇살의 울음임을 안다. 배 시인은 얄밉게도 아기염소로 대신 울게 해 놓고 본인은 애써 아닌 척 비바람으로 불고자 했다. 그러나 배 시인은 눈물만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키는 성분이라는 걸 체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기염소의 울음은 화자인 작가의 울음이다. 사르트르가 우린 이 땅에 그냥 던져진 존재라고 외쳤던 그 울음소리가 이 시에서는 아기염소로 태어났다. 시를 씀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정화(catharsis) 과정, 그래서 시인은 이 모진 세상 시라도 써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늙은 풀뿌리를 품고 앉아 우는 게 전부일 수밖에 없는 아기 염소가 바로 배 시인이고 우리이다. 돌을 씹으면서도 살아야 한다. 너는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살라(겔 16:6)


엄마 엄마 울 엄마
조롱조롱 꽃을 달고 줄줄이 돈 달아
알록달록 꽃가마 태워서 시집 보내드렸더니
이 가시나 생각도 안나나
첫걸음도 꿈속에서
십 년간을 꿈속에서 울 엄마 만나네


울 엄마
반질반질 윤기나는 쪽진 머리
고운 옷 차려입고 고운 각시 낯으로
내 꿈에서 웃으시게
― 「울엄마」 일부


엄마는 내 의식의 고향 내 그리움의 본향. 누군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 몸 한구석이라도 건드리면 그만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엄마는 우리의 우주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준 영원한 이름, 배 시인의 시들은 엄마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측은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이름, 내가 힘들 때 가장 보고 싶고, 애증이 함께 서려 있는 이름, 부르기 전에 먼저 목이 메는 이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명제로 풀어 놨다.


이 땅에서 비상을 꿈꿀 수 있었던 것도 엄마요,남은 세월 가는 그 길도 엄마가 간 그 길이기에 한 떨기 들꽃이 반갑고 바리바리 챙겨주던 그 사랑 앞에 들고 갈 것이 마땅치 않아 시 한 줄로 목을 축이는 배 시인. 살아 있는 동안 들숨 날숨으로 길들었던 기억들이 몸 세포 속에 숨어 있다가 세상을 향해 ‘엄마 나 여기 있어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로 들린다.


3부 가을, 떠나보내고 다시


배 시인의 첫 시집을 전체적으로 볼 때 가능한 수식어는 절제하고 핵심 성분만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메마를 정도로 감성을 억제하지는 않는다. 소재의 다양한 의미를 비유로 무장하고 분석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시가 진부하지 않고 시를 읽는 이들에게 그 신선한 감각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마 대책 없이 수다스러워지는 시들과 차별화하고 오직 나만의 정서, 나만의 울림, 나만의 사념의 무늬로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은 은근히 욕심이 많은 시인이다. 배 시인의 자의식 속에는 생멸의 대한 깊은 사유와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그냥 보지 않고 인연이라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신을 투영해 놓고 있다. 살짝 꼬집을 것이 있다면 시를 다 쓰고 나서 꼭 소리 내어 읽어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르게 시의 리듬이 어디서 막혔는지 호흡이 말해 준다. 왜냐하면 시는 외연적 리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남의 발을 밟고 서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타인의 소망 따윈 중요하지 않다
청춘처럼 꿈꾸게 하는 마성의 매력을 장착하고
서서히 다가오는 것
이기적인 심리가 작동되는 가장 가까이서
절절하게 눈을 감아야 할 순간에
시작하다 무너지고 말 것들을 보내야 한다


본능과 욕심에 대한 극적인 용서를 바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날
시점이 다를 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기적 시점」 일부


가을이 왔나 봅니다
바스러지는 낙엽이 되어버린 뼈마디에
벌레 먹은 흔적을 내어 단풍 든 열기를 삭혀
노란 액체를 쏟아부었습니다
가을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뒹굴고 구르며 가을을 지나 보려 합니다
가을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바스러지는 모양입니다
― 「가을이 왔음을」 일부


위의 시들은 행간과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는 시어들을 읽어야 제맛이 난다. 사실 이타적 시점이나 이기적 시점이나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생의 정답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시점이 달라도 변할 게 없는 그저 맴도는 우리들의 생애이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인데 나와 다름을 무조건 틀렸다고 하는 소아병적 사고, 그저 우린 시점이 다를 뿐 어제나 내일이나 달라질 것은 없다. 또한, 인간의 시간은 언제나 인간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 왔다가 또 그렇게 가 버린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어떤 존재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죽음처럼 다 공평하다. 잘나고 못나고 많고 적고 귀천과 높낮음이 없다.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똑같은 크기, 똑같은 분량이 부여된다. 이보다 더 공평 한 것도 없다. 그래서 배 시인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관점보다 서로 몸 비비고 사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관점으로 가을을 보며 내가 뒹굴고 구르며 바스러져도 이 모든 것은 또한 다 지나가리라는 시어가 갈바람으로 노랗게 분다.


같이 올려 한 적 없어도
다 날 따라나서서
새로 이사한 집에는 복이 나간다는
깨어진 유리도
복 쓸어낸다는 빗자루도 그렇게
비 맞은 하루를 말리며
궂은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버려질 것 다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사하는 날 퍼부어 대던 장대비도
요란하게 터지는 천둥번개도
같이 살아 보자는 것이었나
― 「이사를 하다」 일부


위의 시를 읽으면서 따로 시 공부를 한 적이 없어 부끄럽다는 배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대상이든 난해하고 추상적 표현보다는 주부로서 이사하던 날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구수하게 내 버리지 못한 시어들을 맛깔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시는 상상력이지만 상상력의 자양분은 경험이요, 이면적 사고에서 오는 시각이다.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유는 거저 얻어지는 품성은 아니다. 자아 성찰을 통해서 얻은 그 본질을 구체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려면 끊임없이 보고, 느끼고, 듣고자 했던 관찰자로서의 정서가 몸에 배어야 한다. 요란하게 터지는 천둥번개도 같이 살아 보자는 표현에서 배 시인은 아픔도 미움도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아는 시인임이 반갑다. 울면서 빵을 씹어보지 않고는 가난을 말하지 말라는 말처럼 간접체험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친 직접체험에서 우러난 언어들이 모양 고운 여백을 만들어 주고 있다.


4부 겨울, 다시 채워야 할 것들


시는 문장으로 읽는 게 아니고 빈자리 읽기라는 말이 있듯이 화자가 남겨둔 마음을 읽으면서 공감도 하고 깨달음이나 감동도 얻는 것이다. 시는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품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소재가 주는 이미지를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한다는 것은 최명희 작가의 말처럼 손가락으로 바위에 새기는 피 작업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눈높이만큼만 써진다. 배 시인의 시 세계는 차지고 또렷한 영상이 특징이다. 시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함께 걷고 싶은 길이 거기 보인다. 화려한 몸짓을 거부하고 올곧은 심성대로 그려낸 언어들이 성숙하다. 쓰고 고치며 울고 웃었을 모습. 먼 기억 속 고향과 어머니, 가족, 꽃, 그리움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까지 얼마나 하얗게 날이 선 칼로 가슴을 찔렀을까…….


아직은 떠나보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침묵보다 깊은 멀어짐으로
이별을 말하려 하지만 그 말이 아니라
그 서늘함 때문에 이별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온기마저 남겨준 적 없지만
너무도 버거운 슬픔으로 와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절망은
이미 당신의 침묵을 타고
털어내지 못 할 운명처럼 오고 있습니다
영원 같던 뜨거움은 소낙비처럼
한나절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려 합니다
대답도 주지 않고 떠나려는 당신은
이제 내 소망은 아닌가 봅니다
아직은 보내드리지 못하고
하늘 끝자락에 매달려 다니는 방황으로 잠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석양 지다」 전문


배 시인의 시 세계를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 해설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았다. 시 한 편에 전 우주가 들어가 있고, 시 한 편에 전 생애가 들어가 있는 데 하물며 수십 편에 이르는 작품을 놓고 그 전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아이러니irony이다. 결국, 시 해설은 해설하는 사람의 자기주장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배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창조해 낸 시어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가을이 짙어지고 있다. 여리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그려낸 시들이 읽는 분들에게 따뜻하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배 시인이 형상화시킨 단아한 노래들 속에 나 또한 같은 모습으로 스며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이 있다면 서정문학 카페에다 이 시들을 올려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날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여 문향 가득한 시인으로 우뚝 섰으면 너무 좋겠다.  

작가 소개

배막희
·서정문학 시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서정작가협회 회원
·서정문학 운영위원
·동주대학교 졸업

 

목 차

1부
봄, 그 서늘함에 대해

 해맞이 013
벚꽃 014
봄이여 016
그 나무의 열매 - 버찌 018
기린이 된 소나무 020
봄이라서 022
목련 024
절벽 025
제비꽃 026
동백 028
노루 029
봄을 먹다 030
봄날 032
쑥 - 뿌리를 뽑히다 034
새들의 대화 036
네일 아트 038
한 편의 시를 낳다 039
바닷가 그 다방 040
부적을 태우며 042
생명 044
비 오는 날 046

2부
여름, 이 뜨거움을

 매미의 눈물 051
소 그리고 잡초 052
고양이 053
안개와 구름 054
처서 056
멸치 058
씨를 묻다 060
염소 061
팔월 062
옥수수 063
울 엄마 064
불꽃 066
바위 068
나무의 무덤 069
그곳에는 070
치자 꽃 072
꽃 073
까마귀 074
장미가 피었다는 것은 076
터 077
마삭이 078
군산 여행길에 080

3부
가을, 떠나 보내고 다시

 욕심 085
안개 086
그리움 088
단풍 089
어둠이 널 키우고 090
이기적 시점 092
염소 똥 094
아니, 벌써 095
버려진 인형 096
코스모스 098
야생화 100
가을이 왔음을 102
홍시 104
이사를 하다 106
낙엽 108
영시미 110
머리 자르는 날 112
풍선인형 114
닭, 터널을 지나다 116
가을 118
병실에서 119
은행잎 날다 120
먼지 121
맨드라미 122

4부
겨울, 다시 채워야 할 것들

 가로등 127
고독 128
커피를 내리다 130
 55 132
옥이 134
구속 136
단 한 사람 138
생각 139
방황 140
통증 141
한해살이 142
고드름 143
가라 훨훨 144
승마장 가는 길 146
나들이 148
붉은 동백 150
버스에서 151
엄마 꿈 152
종려나무처럼 154
달팽이 155
목화꽃 156
석양 지다 157
아버지의 겨울밤 158
누군가는 말한다 160

해설 | 내면의 소리 그 큰 울림 | 이훈식 162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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