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
시력(詩歷) 41년, 김용택 시인이 온 생을 다해 골몰해온 일에 대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안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절제된 언어와 서정적 인식으로 담아 오랜 시간 독자의 삶을 다정히 어루만져온 김용택 시인. 그의 열네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이 문학동네시인선 191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를 이루었다 평가받는 첫 시집 『섬진강』 이후 ‘섬진강 시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한 지 올해로 41년, 짧지 않은 시력(詩歷)은 열네 권의 시집과 더불어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콩, 너는 죽었다』 등의 동시집과 8권으로 이루어진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촌철살인의 시 감상평을 담아 시의 장르적 문턱을 낮춘 『시가 내게로 왔다』,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등 시를 ‘쓰는’ 사람이자 시를 ‘살고’ 또 ‘알리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목록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는 고희를 훌쩍 넘긴 시인의 삶에 대한, 앎에 대한 통찰을 한층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진실하고 소박하고 소탈해진다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혼잣말 같기도, 편지 같기도, 때로 기도 같기도 한 55편의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비 걱정을 하고
이웃집 근심도 같이 나누면서
밭을 고르는 선량한 농부 곁에
서 있다 간다
그가 허리를 펴고 서서
시는 잘 써지냐고 내게
묻는다
그렇게 잠깐 서서
비의 기별을 기다리며
쉬시라고
하였다
_‘시인의 말’ 전문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사람들은 왜 모를까」, 199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이라 쓰며 인간사의 부박함을 잘 비추던 때로부터 “나무야/ 봄은 오고 있다/ 너를 올려다본다/ 내 나이 일흔여섯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라고 쓴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숭고한 자연 앞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짧은 한 생을 그리는 데 천착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겸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솟는 여러 번민들이 곳곳에 스민 이번 시집은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 세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거기서부터 삶은 진정으로 시작되리라 예감하게 한다.
“아는 일로 기울어질 때 관조(觀照)는 재확인으로 싱겁게 끝나지만, 모르는 일로 방향을 틀면 관조는 빛나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안다고 생각했으나 몰랐던 장면, 알아서 모르는 척했던 풍경, 알 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를 사방에서 줍고 다닌다. 줍는 일은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이다. 그의 시편에 깨달음 뒤에 찾아오는 물음과, 물음이 물고 오는 깨달음이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음과 깨달음이 반복되는 삶은 한시도 지루할 새가 없다.”
_오은 시인, 발문 「나—비(非)의 순리 잡기」에서
‘모른다’로 가득찬 겸허한 자세의 삶은 새로운 발견과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몸을 낮추어 “어느 날도/ 오늘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어느 날도 오 늘 같은 날은 없다」) 깨달을 수 있다면, ‘모두가 첫날처럼’ 이 삶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며 “경계가 없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나무와 같이 살 수 있으리라. 그렇게 “바람의, 눈송이들의, 새들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새들의 시」)
수십 번 반복된 사계와 수만 번 찾아온 하루를 ‘모두가 첫날처럼’ 새로이 마주하는 일. 어쩌면 그것은 능력이고, 노력과 훈련을 거듭하며 계발되기도 하는 재능이다. 그 훈련의 첫 단계는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 삼요소로 이루어진바, 민달팽이가 길을 건너는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살피고 곧이어 그것이 “그들의 오랜 역사를 내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내 생각대로 말”한 것이라 부연하는 것(「슬픈 역사」), 누군가의 발길에 무람없이 밟히고 말았을지 모를 구체적이고 생생한 풍경을 “어린 쑥들이 마른 풀밭 잔돌 곁에서 돋아”나고 “서리가 녹아 돌도 쑥도 젖”었다 씀으로써 시에 담아 보존하는 것(「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산을 넘어온 달이 강을 건너 마을로 오”는 매일의 반복을 “시의 길”로 받아들이는 것(「달이 다니는 길」)은 고행의 결과나 득도의 경지가 아니기에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느릿한 민달팽이부터 뜨고 지는 달까지, 이 시집 한 권이 관통하는 존재들의 거리감은 이렇듯 시인의 맑은 감각과 목소리로 개별성을 확보하고 아름답게 확장된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멀리 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 마을로 옵니다
마을로 돌아올 때 나는
뉘우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때도 새들은 날고 나뭇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릴 텐데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뒤돌아보며 슬퍼하지요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
한숨을 땅에 묻으면 새싹이 돋아나는 아픔이 인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_「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에서
삶의 유한함과 어쩔 수 없는 무상함은 슬픔과 후회를 가져온다. 덧없는 세상에서 덧없이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길 바란다. “새싹이 돋아나는” 데 아픔이 있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 권한다. 그때 비로소 차오를 온기, ‘모두가 첫날처럼’이라는 불가능한 소망을 간절히 붙든 시인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온기일 것이다.
◎김용택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모두가 첫날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신작 시집이 나왔습니다. 이 제목으로 정한 이유를 들려주세요. 어떤 마음과 생각을 담은 제목인지 궁금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비대면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갖게 했습니다. 나는 일기 쓰는 일 외에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은 짧게 썼습니다. 형식이나 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하루에 한 편씩 마음 편하게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쓰다보니, 이 년여 동안 오백여 편의 글이 써졌습니다. 글이 많아서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 11월 그 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들 속에서 찾아낸 시들이 이 시집의 시들입니다.
우리 모두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아까와는 다른 지금을 살고 싶어합니다. 늘 보던 나무들이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지요. 아니면 이별이거나.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들의 제목을 ‘모두가 첫날처럼’이라 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나 세상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첫날’을 그것도 ‘우리 모두의 첫날’을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2. '나비'가 등장하는 시가 눈에 많이 띕니다. 오은 시인도 발문에서 그 부분을 짚어주었는데요, 선생님께 '나비'가 유독 눈에 띈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나의 말이 나의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말이 되기도 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내 시가 세상과 ‘한편’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나는 늘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지 않고 날개를 펴는 나비의 날개를 생각합니다. 어느 날 나비 몇 마리가 모여 노는 가운데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나비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내 주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녔습니다. 그때 나비의 날개바람이 내 손가락 사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았습니다. 서늘했던 그 바람결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고 바람 위에 누워 어디만큼 흐르다가 바람이 끝나면 다시 네 장의 날개를 펴고 흘러가던 길을 거슬러올라오는 것을 보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나비들은 바람의 특이점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번 시집의 제목도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였지요. 나비가 날개를 펼 때처럼 배경이 없이 자율적으로 사는 삶을 나는 좋아합니다. ‘독립된 자유’는 나의 유일한 꿈입니다. 나는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슬퍼하지요. 내가 태어나 자라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나의 학교요, 서재이며 해마다 새로운 시를 쓰는 나무들과 오래된 농부들은 나의 선생입니다. 해지는 날 나는 반듯한 나무의 곁에 오래 서 있습니다. 나무들 아래로 강물이 흘러가거든요. 나는 슬퍼집니다. 흐르는 강물에 부서지는 달빛 조각들처럼 죽고 사는 슬픔에 기대어 시를 씁니다. 달이 떠서 강을 건너 마을로 오면 나는 달이 다니는 길을 걷습니다. 나는 우리 마을 새들처럼 달이 다니는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3. 코로나19를 겪고 난 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계시고 시에도 자연 앞에 겸허해지는 인간을 자주 그리셨는데요,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감각하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 시집의 시 곳곳에 내가 말하고 싶은 이 시대의 말들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어디서 가져다 쓰고 짜맞춘 말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우러나온 나의 말들이 되어주었습니다. 아직은 서툴지요. 나는 우리의 코앞에서 으르렁대며 겁을 주는 자본의 민낯을 보고 있습니다. 자본을 앞세워 사람을 몰아내고 나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기계와 쓸데없는 일로 싸우는 날이 오겠지요. 나는 감히 인류의 무능을 말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어느 책에서 ‘허황된 미래’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가슴이 텅 비어버린 어둠을 본 듯해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자본의 이 허황된 질주에 대한 절망을 나는 지금 두 손 놓고 보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불안은 자본을 독차지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끝도 갓도 없겠지요. 마른 풀숲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까만 눈의 새들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오래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의 따사로운 손을 잡고 싶지요. 우리는 이렇게 살다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바람은 불고 구름들은 떠다니고 새들은 날고, 나의 나무들은 저녁노을로 시를 쓸 텐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름답고 무한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상을 뜯어고칠 아무런 힘이 없으므로 나는 그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저 수많은 풀숲에 사는 한 마리 작은 새입니다. 나의 시는 그 세상을 흔들어주고 가는 한줄기 바람이고 싶지요.
4. 이번 시집에서 특히 아끼는 시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도 들려주세요.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를 좋아합니다. 이 시는 오래전에 써놓은 시들을 뒤지다가 찾아 새롭게 쓴 시입니다. 제목이 좋습니다. ‘쓸 만한’ 연애가 있구나, 하는 기쁜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꽃밭」은 팬데믹이 시작된 후에 쓴 시인데, 계속 들여다보며 막판까지 손을 본 시입니다. ‘빨래’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빨래를 널고 걷고 개는 일을 좋아합니다.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슬픔으로 기쁨을, 아름다움으로 슬픔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인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니까요. 이 말이 저 말을 이해시키고 저 말로 이 말을 설득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것입니다. 말의 공감은 나도 생각하지 못한 세상에 우리를 데려다놓습니다. 「아름다운 균형」도 좋아합니다. 마당의 감나무처럼 돌보며 가꾼 시입니다. 긴 시였는데 단순하고 간결하게 다듬어졌습니다. 특히 새들이 나를 오래 보고 있었다는 그 말이 좋습니다. 다정하고 다감하게 나와 정든 시입니다. 「기쁜 농부의 노래」와 「그것은 아름다운 변화」를 써놓고 식구들과 기뻐하던 생각이 납니다. 아내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얼굴」은 읽을수록 웃기고 슬픕니다. (쓰다보니 아끼는 시편들이 많아지네요.) 나비 시들도 좋습니다. 내가 내 시를 좋다고 말하니 진짜 내 시가 눈물겹고 자꾸 좋아집니다. 잘 쓴 시라는 것이 아니라 좋아진다는 말이지요. 시를 쓸 때의 그 순결하고 눈물겨운 인정들을 나는 아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의 시들은 내가 조금씩 나를 믿어가며 쓴 시들입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그 뜻을 정확한 곳에 개입시키고 그것이 무한한 세계를 얻어갈 때, 그 말의 뜻이 어느 곳에 멈추어 ‘시의 집’을 지어 식구들을 늘리고, 그리고 그곳에서 내 사랑이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시는 무한을 향해 나가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시를 내가 조금은 알고 세상을 배워가며 쓴 것 같아 기쁩니다. 내게 딱 맞는 옷인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이 세상, 이 세월에 내가 나를 좋아하디니, 철없지요, 어이없지요. 그냥 널리 용서(?)해주세요.
5. 이 시집을 마주할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몇 년 동안 두 눈과 눈 위의 이마와 머리만 보고 살았지요. 생각해보면 코와 입을 가린 얼굴로 잘 살아냈습니다. 숨을 쉬어야 하는 코와 밥을 먹어야 하는 입을 가린 말로 삶을 표현하는 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린 절실하게 겪었습니다. 우리에게 ‘내 얼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류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바이러스가 우리 인류를 한 마을로 단단하게 묶어주었습니다. 시인의 걱정이 커졌습니다. 마을에는 자연이 하는 말을 따르고 자연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선량한 농부들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늘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곱게’ ‘쓰고’ 싶었습니다, 시를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새들에게, 구름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게 모욕을 주는 시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일’들을 우리 너무 많이 저지르고 쉽게 따르고 있습니다. 이겨야 하고 빼앗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고달픈 일상을 우린 이어가야 합니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적대적인 말들이 난무하여 영혼을 시달리게 하고 빨리 시들게 합니다. 나는 우리 인류가 각성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때로 삶의 두려움은 사회적인 공동의 언어가 되지만 그 두려움의 해결은 혼자에게 맡겨집니다.
제 시를 읽으시면서 ‘그대’의 슬픔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싱그러운 얼굴이 되기를 원합니다. 보라색 오동나무꽃이 피는 5월이지요. 오동나무 꽃으로 세상을 설득하여 당신의 사랑을 얻어온다면 저 5월이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할까요. 이 5월이 그런 5월이길 빌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집 뒷산 밤나무 숲에서 꾀꼬리가 처음 울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동꽃이 질 때면 꾀꼬리가 운다는 것을 믿고 있는 나는 그 무렵이면 꾀꼬리를 기다립니다. 세상이 늘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적인 나날들이 우리 모두의 ‘첫날’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는 나의 슬픔으로 당신의 삶이 찬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 있는 힘을 다하여 시들을 썼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달이 다니는 길을 걸어다니면서요. 달이 다니는 길은 내게 사랑의 그 모든 것들을 공부시킵니다.
작가 소개
김용택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2년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꽃산 가는 길』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나무』 『그래서 당신』 『수양버들』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울고 들어온 너에게』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등이 있으며,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콩, 너는 죽었다』 등과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전 8권)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새들은 부러질 나뭇가지로 날아가지 않는다
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 나무에게/ 산앵두꽃/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기쁜 농부의 노래/ 그 어떤 생각 같다/ 살구를 따서 먹다/ 꽃이 나를 보고 있다/ 마음을 담아 걷다/ 네 별이 다칠라/ 현재의 온도/ 시인의 집/ 우리들의 집/ 내 얼굴/ 조금 더 간 생각/ 아니다, 나비가 잠을 잔다고는 말 못 한단다/ 모르는 얼굴/ 겨울이 왔구나
2부 딸은 내가 밤에 읽은 시를 아침에 읽는다
가을이라고 말 못 해서 겨울로 왔어요/ 새들의 시/ 이끼가 사는 곳/ 생의 순간들/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 아침에 인사/ 가을에서 온 사람/ 명랑한 식탁/ 미소를 보내주세요 내가 날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해놓고/ 모두가 첫날처럼/ 웃으면서 한 걸음 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 기억의 노란 날개/ 칸트의 배경/ 우산/ 참새 머리로 들이받기/ 달이 다니는 길
3부 말이 싫은 시가 나는 아름답습니다
봄비/ 이 마음/ 우리들의 꽃밭/ 시인/ 시집/ 아름다운 균형/ 독립된 자유/ 슬픈 역사/ 나비하고 놀다/ 속날개가 다 마를 때까지/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정의의 결과/ 그것은 아름다운 변화/ 그들 곁으로 걸어가다/ 어느 날도 오늘 같은 날은 없다/ 내 아침의 그쪽/ 달과 걷다/ 다시는, 다시는
발문|나—비(非)의 순리 잡기_오은(시인)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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